나로 인해 누군가 작가가 될 수 있다면

-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외 지인 작가도 집필한 각종 저서들
-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외 지인 작가도 집필한 각종 저서들

오늘은 일요일. 그러나 나의 하루는 여전히 새벽 4시에서 출발했다. PC부터 켜고 커피를 마신다. 부팅된 PC에서 ‘한글’부터 불러온다. 이어 네이버와 카카오톡을 양수겸장으로 배치한다.

이로써 글쓰기 준비는 끝이다. 남은 건 머리와 손가락의 이중주와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다. PC 자판에서 생성되는 글은 내가 주인이다. 내가 쓴 글이 활자화되는 것은 차라리 희열이다.

그동안 책을 4권 내고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호칭부터 바뀌었다. ‘경비원 홍 씨’에서 ‘홍 작가님’ 내지 ‘홍 기자님’으로 외연까지 확장됐다. 이젠 어딜 가도 사람 대접을 받는다. 과거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한마디로 책의 힘이다.

4권의 저서는 모두 박봉과 야근을 밥 먹듯 하던 경비원 시절에 쓴 책이다. 동료 경비원들은 시간이나 때우고 잠이나 자려고 눈에 불을 켰지만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그들처럼 세속적 욕망에만 연연했더라면 단언컨대 4권의 출간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잠잘 때, 나는 쏟아지는 졸음의 유혹과 협공을 물리치고 집필에 매달렸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글쓰기에 매진했던 걸까.

첫째, 누추한 현실이 너무 싫었다. 을(乙)이 아니라 차라리 병(丙)이자 기껏 정(丁)에 불과한 경비원이란 직업은 누구나 허투루 깔보는 직업군이었다. 나이도 내 자녀처럼 한참이나 어린 직원이 “어이~ 경비원 일루 와 봐.”라고 호칭할 때는 성공한 아들과 딸이 오버랩 되면서 모멸감이 쓰나미로 몰려왔다.

그 같은 험로(險路)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책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출간의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400번 이상이나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연속이었다.

‘함흥차사’는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아니하거나 늦게 온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을 때, 태종이 보낸 차사를 죽이고 혹은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동안 내가 출판사에 보낸 원고는 또 다른 이성계가 중간에서 붙잡아 두거나 아예 죽였지 싶었다. 그런데도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책을 낸다! 내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이어선 한 시간 강의료를 지금의 급여만큼 받는다!!!’를 신앙처럼 암송했다. 간절하면 현실이 된다 라고 했던가. 결국 나는 모두 4권의 저서를 낸 작가가 되었다.

요즘은 전문작가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도 책을 많이 내고 있다. 원인은 퇴직 후 대비책, 투잡 가능, 미래에 대한 투자 등 다양하다. 수평폭력(사회의 계층 사회에서 하류 계층이 상류 계층으로부터 압력과 공격을 받으면서 쌓인 증오 감정을 같은 하류 계층에 풀려는 현상)까지 난무하던 경비원 직업은 진작 그만두었다.

사람 잡는 야근을 안 하니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오늘은 작가로 데뷔하고자 하는 지인을 위해 구입하여 읽은 뒤 보관중인 <책 잘 쓰는 법>을 다룬 저서들을 정리했다.

사람이 십인십색(十人十色)이듯 그 책을 쓴 작가와 저자들의 주장 역시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어쨌든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이라는 말이 있다.

출간에서도 산전수전(山戰水戰)이 모자라 심지어 공중전까지 겪은 나로 인해 누군가 우뚝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더 행복해질 것이다. 추상적이긴 하되 베푼 만큼 채워진다는 말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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