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일본 교수회 부학장 강신영 /한일 교류학 교수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일본 교수회 부학장/한일 교류학 교수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일본 교수회 부학장/한일 교류학 교수

 

일본의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차별을 받지않고 제대로 대우받고 살아가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의사 또는 변호사가 되라는 말이 있다. 반면에 일본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채 낙오하면 「야쿠자」(ヤクザ)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미국에 마피아, 중국에 삼합회가 있다면 일본에는 「야쿠자」란 폭력조직이 있다. 「야쿠자」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바쿠도」(博徒, 도박 집단)로부터 시작됐다고 하며, 어원은 확실치 않지만 도박용어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이 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직업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무라이를「로우닌」(浪人)이라고 했는데 「로우닌」은 「야쿠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야쿠자」는 두가지 종류의 일에 종사했는데 대개는「테키야」(的屋)와 「바쿠도」(博徒)로 나뉜다. 「테키야」는 에도시대에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부류에 속했던 자들로서 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다. 주로 장사를 하거나 신사 혹은 사찰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역할을 했는데 추후 자신들의 상권 이익 보호를 위해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이들은 차츰 물건을 제값보다 비싸게 팔거나 사기행각을 벌이는 등 범죄조직으로 변질하게 된다. 한편,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는 도박이 성행했는데 「바쿠도」는 직접 도박판에 뛰어들거나 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으며, 당시 도박은 불법이었으므로 이들은 「테키야」보다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처지였다. 「테키야」와「바쿠도」는 일본사회에서 서민들에 기생해 살아가는 조직으로 깊이 뿌리를 내려 오늘날 「야쿠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의 센코쿠시대(戰國時代)이후 도래한 오랜 평화시절과 뒤를 이은 근대화 바람으로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되었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각성한 일부 사무라이들이 학자와 관료, 상공인 등으로 출세한 자들도 생겨났지만 그런 부류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채 폭력집단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중일전쟁(中日戰爭)과 태평양전쟁 등을 계기로 극우조직의 하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미 군정하에서는 재일동포를 주축으로 구성된 삼국인(三國人)에 대항하는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삼국인은 일제 패망이후 차별을 받아오던 한국, 중국, 대만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일본사회에 대한 반감이 커 치안당국의 골칫거리 존재였음에도 무시못할 세력이어서 제어할 방도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조직 등에 몸담고 있던 폭력배들은 전후 혼란속에 밀무역과 암시장이 횡행한 고베항(神戶港) 일대에서 「야마구치구미」(山口組)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 「야쿠자」조직의 탄생이었다. 「야마구치구미」는 점차 군소세력을 규합한후 경찰을 대신해 당시 치안 골칫거리인 삼국인들을 제압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일본은 전후 혼란기를 틈타 그간 차별당해온 삼국인들이 암시장을 장악하고 자릿세 명목으로 상인들을 위협해도 경찰력이 부족해 이들에 대한 단속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을 대신해 삼국인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발휘한 조직이 「야마구치구미」를 비롯한 폭력조직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차별받은데 대한 복수심과 민족심으로 똘똘 뭉친 삼국인들의 급속한 세력확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야마구치구미」가 대항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일본 국민들사이에서는 이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기마저 생겨났다. 이처럼 전후 치안당국의 고민거리였던 삼국인과의 투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야쿠자」는 1960-8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지하경제를 장악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과정에서 주요「야쿠자」조직들은 암시장, 건설업, 사금융 등 거대한 검은 이권을 둘러싼 영역 다툼으로 파벌간 항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들어 오키나와지역 진출을 추진한 「야마구치구미」와 오키나와 토착 폭력단간에 대규모 항쟁이 발발한 것을 계기로 급기야 일본 정부는 「폭력단대책법」을 제정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게 되었다. 

 

「폭력단대책법」은 대규모 야쿠자 조직들을 대상으로 지정폭력단이라는 명분으로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조직상부층까지 처벌을 가능케함으로써 조직 약체화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률이 시행된 이후 조직간 항쟁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이를 견디다못해 「야쿠자」조직을 떠나는 자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에도 각 지자체는 2011년경부터 「야쿠자」에 종사하는 조직원들에 대해 본인 명의 계좌개설 금지와 보험 가입을 어렵게하거나 주택임대 제한 등 각종 제약을 가해 사실상 사회에서 퇴출시키는 불이익을 줌으로써 조직탈퇴를 유도하고 있다. 일본 경찰은 집중 감시하고 있는 「야쿠자」조직에 대해 조직원 5명이 한곳에 모이기라도 하면 즉시 체포할수 있는 「지정폭력단」을 지정해 단속을 강화하고 있으나 당국의 압박이 거세어질수록 「야쿠자」는 합법을 가장하거나 지하속으로 숨어드는 형태로 생존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사항은 「야쿠자」와 재일동포들의 연관성이다. 재일동포사회에서는「야쿠자」가운데 20-30%는 동포들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만큼 재일동포들이 「야쿠자」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재일동포들이 「야쿠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데는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는 징용 또는 생계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일했으나 해방후 다수가 귀국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민들은 오랫동안의 일본 생활로 인해 한국내 터전을 잃어버림에 따라 귀국을 포기했고,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많은 일본에 정착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그숫자가 200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의 일본 생활은 어려움이 많았다. 재일동포 자녀들은 성장기나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비해 갖가지 차별을 받게 되었고, 운좋게 직장을 구한다해도 직장내 차별로 퇴사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공직 취업은 원천적으로 불허되었으며, 차별용어인 「조센징」(朝鮮人)이라는 굴레를 씌워 제대로 된 직장에서는 면접단계에서부터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 기업에 입사원서를 제출해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탈락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에서 재일동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열심히 공부해 의과대학에서 자격증을 취득해 의사로 취업하거나 법과대학을 나와 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를 개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시내에는 의사 5명중에 한명이 우리사람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재일동포 의사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일본사회에서 전문자격증을 취득해 의사나 변호사, 세무사 등으로 삶을 영위하는 동포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절대다수는 상대적으로 차별이 덜한 자영업 또는 유흥업, 상공업 등 서비스업이나 폐기물처리 및 건설업 등 일본인들이 꺼리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스포츠나 연예계 방면으로 진출해 성공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나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재일동포들은 주변의 일본인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자연스럽게「야쿠자」세계에 발을 들이거나 「야쿠자」들과 유착관계가 깊은 유기업(일명 파친코)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재일동포 「야쿠자」로는 양원석(梁元錫) 이란 인물을 들수 있다. 일본명 야나가와 지로(柳川 次郎)로 알려진 그는 경쟁 조직과의 항쟁시 사무라이들이 사용한 일본도(日本刀)로 제압해 일약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양원석은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살았는데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가족들은 고향인 부산으로 귀환했지만 홀로 일본에 남게 되었다. 혼자 남게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한국으로 출항하는 연락선을 타려던 중 일본 불량배들과 싸움에 휘말려 배를 놓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오사카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이후 지하세계에 발을 들인 그는 「야나가와구미」(柳川祖)를 결성해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서일본 최대 「야쿠자」조직으로 성장한 「야마구치구미」두목인 다오카 카즈오(田岡 一雄)의 눈에 들어 산하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원석은 조직확장의 돌격대 역할을 자임해 「야마구치구미」가 전국조직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상대조직과의 항쟁시 무참할 정도로 짓밟아 「죽음의 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야쿠자」로서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2002년 일대기를 다룬 비디오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일동포 폭력조직이란 약점 때문에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의 표적이 되어 조직을 해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부의 허락없이 조직을 해산했다는 이유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절연을 당했고 야쿠자세계에서 손을 씻은 이후에는 민단 지부장을 맡아 조총련을 견제하는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재일동포 「야쿠자」로는 정건영(鄭建永)이 있다. 일본명으로는 마츠이 히사유키(町井 久之)로 통했다. 1923년 재일동포 2세로 도쿄에서 출생한 그는 본국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와 센슈대학(專修大學)을 중퇴한 엘리트였다. 맥아더 군정하의 어수선한 틈을 타 암달러상으로 막대한 이윤을 손에 쥐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표면적으로는 조총련에 대항하는 우익을 표방한 「도우세이카이」(東成會)를 결성했다. 이후 조직원 1,600명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경찰의 단속으로 위기에 처하자 우익의 거물로서 일 정계와도 파이프가 있는 고다마 요시오(児玉 誉士夫)의 도움으로 헤쳐나갈수 있었다. 이후 요시오는 「야마구치구미」에 정건영을 소개시켜 주었고, 이를 계기로 관서지역(關西地域)과 관동지역(關東地域)을 대표하는 양대 폭력조직은 결연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다오카는 도쿄 진출을 통해 전국조직으로 도약을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건영과 손을 맞잡게 된 것이었다. 한편, 정건영은 경찰의 일제단속으로 1966년 야쿠자 세계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위장사업체를 설립해 한국과 일본의 정계요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역도산(力道山) 등 재일동포 유명인들의 뒤를 봐주는데 앞장섰으며,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참가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 축구대표팀을 지원해 주는 등 모국을 돕는데 힘을 쏟기도했다. 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해온 「야쿠자」로는 조규화(曺圭化, 일본명 마츠야마 신이치) 「쿄쿠도카이」(極東會)회장을 들수 있다. 그가 이끌었던 조직은 도쿄에서 홋카이도에 걸쳐 30여개 지부와 수백명의 조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규화 회장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어릴적 부모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와 노점상 연합회 계열의 「야쿠자」조직을 이끌어왔는데 일본 당국이 집중감시를 하고 있는 지정폭력단 22개중에서도 상위에 포함되는 조직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대표적인 「야쿠자」조직으로는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스미요시카이」(住吉会), 「이나가와카이」(稲川会) 가 있고, 이들이 3대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기준 「야마구치구미」약 8,900명, 「스미요시카이」약 4,500명, 「이나가와카이」약 3,400명으로 전성기에 비해 조직원 숫자가 대폭 줄었고 다른 폭력단들도 마찬가지다. 「야쿠자」조직이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세력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야마구치구미」는 2010년대 까지만해도 조직원수가 1만 6천명에 달했고 각종 이권과 수익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한화 약 96조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마구치구미」는 100여년전 고베항의 부두가에서 이권을 챙기는 소규모 조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처럼 공룡조직으로 키운 것은 3대 조장 다오카 카즈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기존의 「야쿠자」들과는 달리 폭력을 담당하는 조직과 비지니스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이원화하는 교묘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경찰의 단속으로부터 이권을 보호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를 테면 이권개입과 폭력사건에 연루된 부하들이 구속되더라도 비즈니스 조직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함으로써 조직핵심으로 피해가 미치는 것을 방지할수 있었다. 또한 이전까지는 「야쿠자」의 주된 수입원이 도박 혹은 마약밀매 등이었으나 그는 조직원들이 마약에 손을 대지 못하게하는 대신 합법적인 사업체 설립 등 수법으로 경찰의 단속을 피하도록 했다. 연예계와 「야쿠자」간의 유착관계도 다오카 카즈오가 고안한 것이었다. 이전에는 「야쿠자」들이 연예계의 뒤를 봐주는 대신 보호세 명목으로 돈을 착취하는 구조였으나 그는 아예 연예기획사인 「고베예능사」(神戶藝能社)를 설립해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등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을 산하에 끌어들여 막대한 수입원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예능계와의 밀착은 일본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일본 최고의 예능인이자 국민 MC로 유명했던 시마다 신스케(島田 紳助)방송 퇴출 사건이다. 2011년 당시 일본 최고의 인기 예능인으로 군림하던 신스케는 「야마구치구미」중간간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실이 보도되자 그는 전격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했는데 아직도 연예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야쿠자」들간의 항쟁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하고 있다. 최근들어 항쟁을 벌이고 있는 조직은 최대 규모인 「야마구치구미」와 7년전 같은 조직에서 떨어져나간 「고베야마구치구미」(神戶山口祖)이다. 숫적으로는「야마구치구미」가 우세하지만 양측은 상대 간부를 습격하거나 테러를 가하는 등의 수법으로 피비린내나는 항쟁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반면 「야쿠자」조직들이 자신들의 부정적 이미지 제고에 나선 경우도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피폭위험 등 원전의 위험성으로 인해 사고 수습에 동원할 인력을 제때에 구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있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야쿠자」조직들이었다. 전국의 「야쿠자」조직들이 원전에서 일할 노동자 모집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생활고 등으로 궁지에 몰린 일반인들과 더불어 「야쿠자」말단조직원들도 현장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드러나 한때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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