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강한’ 남자 중의 남자, 그의 인생 쓴맛·단맛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 최성운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최 회장님은 어떤 사람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작은 거인이죠. 그냥 딱 남자요, 남자 중의 남자요! 지켜보시면, 압니다.”라는 짧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짧은 대담으로 그를 ‘어떤 사람이다’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도, 그의 직원들도 대답이 단답형이고, 말을 아끼는 과였다. 하지만 자신의 리더를 표현하는 사람들의 짧고 담백한 표현 이면에는 어떤 심지 깊은 신뢰와 아우라가 느껴졌다.

가식 없고, 포장할 줄 모르는 그의 담담한 태도는 전력질주해 살아온 사람만이 갖는 자신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 최성운 회장 취임식

 

한국생산성본부(KPC)는?

국가의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민간이 중심이 돼 1957년 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이후 1986년 특별법인으로 재발족, 현재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특별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가의 생산성 연구조사, 교육훈련, 컨설팅, 지수조사발표, 각종 자격인증 등 국가의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을 지원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의 교육·컨설팅 전문 기관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교육훈련프로그램으로는 리더십, 회계, 구매, 영업, 물류, IT(정보기술) 등 780여 과목이 개발돼, 현장감 넘치는 실무 중심교육이 국민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KPC가 인증하는 자격에는 ITQ(정보기술자격), GTQ(그래픽기술자격), SW코딩자격, ERP정보관리사, MAT경영능력시험 등 다수가 있다.

본사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하며, 대전충청지역본부(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220)를 포함한 4개의 지역본부가 있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 최성운

국내에 대학과 단체에서 개설하는 최고경영자 과정 아카데미가 많다. 그중 KPC가 주관하는 CEO 최고경영자 과정 아카데미는 전통과 역사가 깊다.

대전충청지역본부는 지난 4월에 제19기 수강생을 모집해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지금까지 배출된 수료생은 680여 명이며, 수료 차수별로 선출된 80명의 임원진이 활동하고 있다. 이 조직은 수료생들의 끈끈한 유대와 화합을 기반으로 지역사회 발전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 최성운 회장이 19기 워크숍에서 축하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제11대 CEO 아카데미 총 교류회장으로 취임한 최성운 ㈜원마루 ㈜바다수산 대표는 남다른 리더십과 추진력으로 조직의 발전과 화합의 적임자라는 평을 듣는다. 대전 동구 신흥동에서 태어난 최 회장은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에서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는 이중고로 남다른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다.

성인이 돼서는 장돌뱅이, 난전 생활을 전전하며 파란만장한 인생 부침을 겪다 이후 요식업, 건설시행 사업에 뛰어들어 불굴의 투지로 자수성가했다. 40대 전후, 사업체를 이끄는 와중에도 아비로서 자식들 기죽일까봐 대학은 졸업해야겠다 싶었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 최성운

고등학교 때에는 공부를 안 했다. 배운 건 플루트 뿐. 플루트 실기로 음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을 견디려 밴드부에서 분 플루트가 대학 졸업장을 가져다주었다니 아이러니다. 그는 늦공부로 경영대학원까지 수료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지난 인생역정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사업의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듯,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다.

자칭 ‘체질이 사업가’라는 최성운 회장. 특유의 끈기와 근성으로 ‘가난한 신흥동 막내아들’에서 여러 사업의 CEO가 되기까지 그의 성공스토리가 궁금하다. 아울러 그의 인간적인 면면과 오늘을 있게 한 일대기를 엿보며 또 하나의 세상을 보고자 한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 최성운

■ 사춘기 반항기, 어머니는 그를 사람 만들려 빚내서 플루트를 사주셨다

‘툭툭’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그가 눈을 떴다.

“집에 가자!”

사춘기 시절 가출해 모처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는 매번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가 가출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알아내고 어김없이 그를 찾아와 말없이 등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지구한 사랑이 없었으면 그의 인생은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그는 술회했다.

“공부를 못해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딱 문제아였죠. 가출하고, 담배 피우고, 선생님께 대들고, 결석을 밥 먹듯 했죠. 상고에 다녔지만 주산, 부기 자격 하나도 없고요.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닐 상황이었어요. 외가 친척 중 선생님이 계셨는데 다행히도 그런 사태를 막아주셨어요. 그분이 ‘주간 밴드부에 들어가 마음을 붙여봐라’고 하셨죠.”

30만 원. 어머니는 그 당시 형편에 감히 못살 것 같은 악기인 플루트를 기꺼이 사 주셨다. 고등학교는 졸업시켜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에 빚을 내서까지 사주신 것이다. 그 길로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플루트를 불었다. 당시 밴드부를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보니 오디션은 생략하고 그는 밴드부원이 됐다. 하지만 음악에 취미도 재능도 없었다. 당시, 밴드부원은 연습하고 대회에 나가야 해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지만 참작이 됐다.

수업에 빠지는 것이 좋고,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했기에 꾸역꾸역 다녀 대전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다. 밴드부의 영향인지 그는 지금도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은 린의 트로트가 좋다고 했다.

대전시 신흥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신 엘리트였다. 하지만 결혼 후 늦게 간 군대에서 돌연 의가사제대 후 딴사람이 되었다. 어떤 쇼크가 있었는지 술에 절어 사셨고 주사도 심해만 갔다. 객지로 떠돌아 집안도 등한시 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시더니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가정을 이끌며 4남매를 키워내셨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로, 부유한 집안의 맏이였다. 고생 않고 자란 귀한 딸이었다. 하지만 출가외인이라 친정에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다. 각종 행상, 생선 장사. 식당, 파출부, 가정부 일을 하며 가정 살림을 이어가셨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신흥동에서 라면집을 했을 때 기억이 선명하고 했다. 연탄을 연로로 쓰던 시절, 아침, 저녁 가게를 열 때나 닫을 때, 어머니는 연탄불을 치성으로 관리했다. 신흥동 다리를 건너, 집까지 가는 길. 어머니는 바케스에 연탄 불씨를 고이 담아 자전거로 싣고 다녔는데 주름진 얼굴로 연탄불을 꺼트릴까봐 내내 들여다보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 연탄불을 꺼트리면 그 날 장사를 못하니 가족의 양식 줄 같은 그 연탄불을 어머니는 절대로 꺼트려서는 안 됐다. 어린 그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뭔지 모르는 슬픔이 몰려왔다.

“어머니는 저를 막내라고 많이 귀여워하셨어요. 없는 살림인데도 제가 해달라고 하면 한 번도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었어요. 빚에 쪼들려 리어카에 짐을 실어 야반도주를 했던 적도 많았어요. 어머니는 우리 마음을 다칠까봐 ‘짐 싣고 이사가자’ 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죠.”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에게 언제나 뼈저리고 아픈 기억으로 다가오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한 사람으로 그의 가슴에 존재하고 있다.

제11대 총교류회 임원들 임명장 수여

■ 인생 쓴맛… 심사숙고해도 항상 빈틈이 생기는 게 사업

인생의 온갖 쓰디쓴 맛을 고루 다 봤다는 그. 먼저 쓴맛에 대해 물었다.

지인과 술좌석에서 얘기 중 우연히 들은 ‘천당 옆에 분당 있다’는 얘기가 머릿속에 꽂히고 말았다. 경기도 분당에 돈의 흐름이 많으니 투자가치가 크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서울과 가까운 그곳에 나도 진출해 봐야겠다’는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의욕에 찼다. 바로 행동에 옮겨버렸다. 경기도 분당시 역전 큰 빌딩에 씨푸드 뷔페를 큰 규모로 오픈했다. 역세권이라 유동인구가 많고, 향후 도시 발전성이 크다는 나름의 판단 결과였다. 하지만 사전조사의 허점이 뒤를 덮치고 말았다.

주말에는 손님들이 번호표를 받고 대기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주중은 적막강산이었다. 그곳은 소위 말하는 베드타운. 사람들은 사업, 직장 일은 강남 등지에서 하고 잠자는 시간이 돼서야 귀가했다. 주말이나 돼야 사람들이 머물며 소비가 일어났다.

대규모 뷔페 매장이다 보니 월세가 엄청났고, 인맥도 최대로 동원해 고용했었다. 주방 실장 등 고급 인력과 남·여 직원 숙소까지 제공하는 등 많은 고정비가 지출돼 매월 적자가 쌓이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결단의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이러다 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점심까지만 영업하고 그만 접자. 대전으로 철수!”

매장의 집기를 철거하고 짐을 꾸렸다. 당일 아침 폐업을 결정하다 보니 주방 직원들은 얼떨떨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당일 반찬으로 김칫국이 큰 솥에 한가득 준비돼 있었다. 버릴 수가 없어 그것을 싸 트럭에 실었다. 뼈가 저렸던 그 순간을 그는 항상 기억한다.

“사업이라는 게 아무리 심사숙고해 준비해도 빈틈은 항상 도사리고 있고, 예상 못한 위험도 따라다니죠. 그때 내 자신, 더욱 철두철미해져야겠다고 입을 앙다물었습니다.”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 최성운 회장이 19기 박창오 회장에게 축하의 꽃다발과 축하금을 증정하고 있다.

■ 장돌뱅이, 떡볶이 장사… 밑바닥부터 사업수완 다져

최 회장은 젊어서부터 삶의 험난한 전선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군대를 마치고는 친구와 장돌뱅이 생활을 시작했다. 자반고등어, 멸치, 건어물, 소주 잔 수에 멍게를 안주로 파는 장사 등 별별 장사를 다 했다. 고등어를 팔 때는 단가를 낮춰보려, 직접 고등어를 떼다가 배 갈라 소금 뿌려 간고등어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때 벌이는 먹고살며 제자리걸음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후 배추 밭떼기 장사를 하게 됐는데, 농작물 경험이 없었다. 찬바람이 불더니 서리가 내려 배추 속이 갑자기 노랗게 썩어들어 갔다. 목돈 들여 사놓은 배추가 썩어 들어가니 그는 심장도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고민 끝에 난전에 놓고 배추를 팔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그 계기로 친구와 길거리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그 당시 유행하던 왕 떡볶이, 어묵국을 트럭에서 조리 시설을 해 팔았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다.

앳된 총각 둘이 아파트 앞에 트럭을 대고 살아보겠다고 떡볶이 장사를 하니, 동내 새댁들이 좋게 봐 줬는지 매일 팔아주었다. 그러다 사고를 만났다. 당시 가스로 철판을 가열해 떡볶이를 만들었는데, 가스 누출을 모르고 불을 당기다 그만 가스가 터져버렸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고 장사를 접어야 했다.

상처가 회복이 된 후, 또 다른 사업을 찾았다. 아는 지인이 하던 건재상을 정리한다고 해서 대출을 받아 인수했다. 건재상을 하던 시절, 하루에 시멘트 팔백 포를 실어 날랐다.

“공장에서 시멘트가 갓 출고되면 뜨끈뜨끈해요. 그걸 4.5톤 트럭에 한 차 실으면 200~250포 정도 되죠. 조그만 한 덩치에 40kg 되는 시멘트를 한 차 싣는 노가다를 하다 보면, 상의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죠. 당시, 시멘트 한 포에 상차비, 하차비를 따로 매겼으니, 내가 내 몸으로 그 작업을 때웠어요. 마진을 더 남겨보려 기를 썼죠.”

대전 동구 오정동에 그가 연 3천 원 가족뷔페는 그의 요식업계 첫 출발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식당을 할 때 지켜보기도 해서 그는 음식을 제법 잘 만든다고 했다.

제10대 사무총장, 재무총장에게 감사패 수여

■ ㈜원마루 “나는 위기에 강한 사람”… 인생의 단맛

뷔페 사업을 실패하고 대전으로 돌아와 사업구상을 했다. 세종시 건설 시행 사업에 입찰했다. 세종시에 대한 정부의 입장 차이로 향후 전망이 오락가락하고 있던 차에 정권이 바뀌며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을 때다.

주상복합아파트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분양율 100%를 달성했다. 험난했던 과정을 보내며 진행해 왔던 사업이 좋은 성적으로 나타나자 참으로 만족스럽고 기뻤다.

“시행 사업에서 수익을 남긴 것도 물론 좋지만, 힘든 사업과정을 무사히 치러 분양율 100%로 완판됐다는 성취감은 그 무엇보다 더 컸어요. 이웃 건물들은 우리 사업과는 다르게 분양에 난항을 겪고 있었죠. 시행사업 나름의 불안감도 있었죠. 하지만 모험심과 도전정신으로 시도했고 좋은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시행 사업에 주력하고 싶어요.”

시행 사업은 부지 입지를 잘 고려해야 하고. 공신력 있는 건설회사, 분양사 선택도 중요하다고 했다. 시행 사업주의 개인적 안목과 탈렌트, 파트너 또한 잘 만나야 성공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건설 시행은 종합 예술이라고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5년 전 그가 설립한 건설시행사 ㈜원마루. 기업 명칭에 ‘원(one)’은 하나, 으뜸을 상징하며 ‘마루’는 하늘을 상징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 합성어는 곧 으뜸 하늘, 최고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높은 의욕과 이상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황선영 이임회장에게 최고 리더상 수여

■ ㈜바다수산… “내가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는 사업”

자잘한 사업으로 잔뼈가 굵어지면서 요식업에 관심이 많아졌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수산물 센터에 눈이 자주 갔다며 그는 말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을 둘러보면서 ‘나도 저런 수산물 센터를 만들어 봐야겠다!’ 했지요. 젊어서 생선 장사를 하며 생선을 많이 유통시키고 만져도 봤지요. 요식업의 경험도 다년간 쌓여 있었으니. 제 사업이라고 느낀 거죠.”

수산물 센터라는 것이 신선도가 생명인 생물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보니 유통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필수지만 그는 그 분야에 식견이 많다고 자부한다.

1500여 평의 부지에 자리 잡아 중부권 최대 회센터라 일컫는 대전광역시 서구 계룡로에 위치한 바다수산은 넓은 주차장까지 완비해 단체 회식, 가족 외식 장소로 유명하다. 수산부, 조리부로 나뉘어 관리되는데 손님이 원하는 생선을 선택하면 회가 손질돼 상차림으로 제공된다. 바다수산 사업 시작 때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계룡로 부지를 보고, 제가 사업을 구상하니,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다 망하는 자리’라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대로 인접 여건, 넓은 부지, 주차공간, 고객 접근성 등 여러 면에서 적격이다 싶어서 개점을 밀어붙였습니다.”

개점하고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개점 초에는 뷔페와 회센터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뷔페 테이블을 두고 샐러드, 중국요리를 자유롭게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개점과 동시에 고객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다.

회를 뜨는 동안 뷔페를 먹게 되니 고객은 회가 나오기 전에 포만감이 들어 회를 남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뷔페 음식도 많이 버려졌다. 이런 폐단을 조정하여 나중에는 ‘상차림’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3여 년 코로나 시국에는 적자를 많이 봐야 했다. 대규모 센터다 보니 모임이나 단체 손님 비중이 많은데 코로나 상황이라 집합 금지 조항이 있어 손님들이 모이지 못했다. 매출이 줄어들었지만 고용된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었고, 월세에 기본 고정비 부담이 컸다. 다행히 수산센터가 체육관을 하던 장소라 천정이 매우 높은 형태로 실내 공기가 상대적으로 청량하게 관리되는 이점이 있었다.

수산센터의 특성상 여름은 비수기이고 겨울이 성수기인데, 지난 겨울에 코로나가 더 극성이어서 개인사업자들에게는 더 추운 겨울이었다. 코로나가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분위기라 바다수산의 영업은 현재 정상궤도로 올라가고 있다.

“어쨌든 바다수산은 제가 하던 일입니다. 내가 좋아해서 하고, 아는 사업이니 더욱 혼신을 기울여하는 겁니다. 회센터, 요식업이 제 취미에 잘 맞습니다. 일단 열었으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한길로 꾸준히 갑니다. 지금은 작은 형님이 그 일들 많이 도와주고 계시죠.”

2022 대전·세종·충청 KPC-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 최성운

■ 예순 앞에서니,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 사회봉사

지난해, 그는 대전체육단체장협의회 제3대 의장으로 추대됐다. 올해로 2년째, 체육인의 권익과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올해 3월에는 KPC CEO 아카데미 제11대 총 교류회장으로 새로운 중책을 맡았다.

“제가 CEO 아카데미 제15기 기수 회장이었으니 올해 순번 상 당연직으로 제가 회장을 맡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전을 대표하는 CEO 아카데미, 기업인 단체로서 회원들의 위상을 정립하고 회원들의 도전과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임기 2년 동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내 많은 CEO들의 자기개발, 사교모임 중 KPC 프로그램이 제일 훌륭합니다. 강의 퀄리티, 인적 퀄리티 또한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는 바쁜 사업 일정 중에서도 활발한 인적 교류가 필요하고 에너지가 된다고 했다. 마음이 통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 같이 운동하고 밥 먹으며 사는 이야기 하고, 사업 고민도 함께 나누는 시간이 그에게는 힐링의 시간이다. 어렵게 자라온 가정사가 있었기에 사회봉사의 필요성도 절감한다.

“대전시에는 열일곱 개의 노인과 노숙자을 위한 무료 배식소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관련 기관에서 ‘삼천 원의 행복’이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향후 이런 기관의 일을 맡아서 후원하고 또 운영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양한 인맥을 이용해 자원봉사자도 모집하고, 여러 물품도 기부 받는 구상도 해왔다. 오래전부터 숙제를 가진 것처럼 이런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나이도 드니 뜻있는 일을 해봐야지 않겠나 싶다고 한다.

그와 ㈜바다수산은 대전시 지체장애인협회에 수차례 기부와 단체 음식 등을 만들어 제공하는 봉사를 해왔다. 그는 굳이 이런 선행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며 음지에 있고자 했다. 그러나 지난 4월에는 장애인의 인권 향상과 복지증진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최성운 회장에게 꽃다발 증정

■ 아래윗집 살다 ‘옥상 데이트’로 부부되다

“얘야, 저녁 먹게 이쪽으로 좀 나올래?”

건재상을 운영하던 30대 초 총각으로, 성남동에 살 때다. 아내 될 그녀는 주인세대로 1층에 살았고, 그는 2층에 어머니와 사글세 살았다. 어느 날 퇴근 무렵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게를 정리하고 달려가니 어디서 많이 본 아주머니가 식사 자리에 앉아계셨다. 1층 주인 아주머니였고, 나보다 2살 어린 주인집 딸도 다소곳이 옆자리에 있었다. 그동안 아래, 윗집에 살다 보니 마주치면 눈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건재상 일에 몰두하느라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장모 될 사람 눈에는 꽤 성실해 보였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른들께 한 결 같이 인사성 좋은 그 모습도 좋아 사위 삼고 싶었다고 한다.

평소 예쁘장하게 생긴 주인댁 딸이 싫지 않았던 결에 맞은 맞선이 그는 내심 기뻤다. 아내는 말수가 많지 않고, 순한 성향을 가졌는데 그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힘든 건재상 일을 마치면 새벽에나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 일을 마치면 부리나케 밥을 먹고 씻었다. 서로 약속을 하고 옥상으로 뛰어올라가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삐삐로 연락하던 그 시절 바쁜 와중에도 그것을 수시로 만지작거렸다.

1년여 옥상연애는 이어졌고 그들은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식 주례는 중학교 때 속을 많이도 썩여드린 선생님께 부탁했다. 그는 살면서 가장 은혜를 받은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그를 밴드부에 들어가 학교를 졸업하게 해 주신 선생님이고, 다른 한 분은 그가 그렇게도 속 썩여도 뭐라 한 번도 나쁘게 질책하지 않으시고 따듯이 품어주신 선생님이라 한다.

“내 주례선생님은 그분으로 모시고 싶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죠. 지위 높고, 번듯한 자리에 있는 분도 좋지만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을 모시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결혼식 사진 보면서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는 결혼해 1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최성운 회장 가족

■ 좌고우면(左顧右眄) 않고 적절한 타이밍을 거머쥐고 앞으로 나갈 것

그는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남다른 집중력과 근성이 있다. 한 가지가 꽂히면 될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러다 난관을 만나 후퇴가 필요하면 그는 좌고우면 하지 않는다. 적절한 타이밍을 알아 접을 때도 과감히 정리한다.

“제가 무너지면 내 가족, 내 직원들이 다 무너집니다. 항상 신중하게 자신을 가다듬고 길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요.”

최 회장은 자신의 장점이 ‘위기에 강한 것’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고생한 것이 오히려 본인에게는 큰 약이 됐고 강인한 골조로 얽어져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선생님 말씀 ‘남자는 100원을 쓰면 200원이 들어오니 절대 남에게 인색하지 말고 베풀고 살아라. 그러면 그 기쁨이 두 배, 세 배가 된다’는 가르침은 그의 가슴에 항상 새겼다.

어려운 사람을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항상 남에게 후하게 베풀며 살고 싶다는 그. 사람들은 그가 천상 강하고 남자다운 남자라고 말하지만, 그는 의외의 부드러움과 섬세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 그가 좋아해서 했건, 필요에 의해서 했건 그는 플루트를 연주했던 사람이다. 섬세한 악기를 만지고 다루면서 더욱 정교하고 정제된 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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