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편 #3 무(無)라는 개념의 의의(意義)(왕필통행본 제 11장)

 

 

 

 

인류편 #3 무(無)라는 개념의 의의(意義)(왕필통행본 제 11장)

 

原文)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直譯)

三十輻共一轂(삼십폭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은 하나의 허브에 모여드는데,

當其無 有車之用(당기무 유차지용)

그 허브의 중심 아무것도 없는 데가 굴러가는 차의 쓰임이다.

埏埴以爲器(선식이위기)

찰흙을 주물러 빚어 그릇을 만들면

當其無 有器之用(당기무 유기지용)

마땅히 둥그렇게 비어있는 데가 그릇으로 쓰이는 곳이다.

鑿戶牖以爲室(착호유이위실)

벽을 뚫어 벽창호를 내어 방으로 만들면

當其無 有室之用(당기무 유실지용)

텅비어 아무것도 없는 곳이 방으로의 쓰임이 된다.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그럼으로 어떤 것이 있기에 유익하다고 함은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그 물건이 가진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解說)

이 11장에서는 무(無)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흔히들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아무것도 함이 없이 스스로 되어가는 대로 두면 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는 오해 중에서도 극히 심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말이다. 노자는 그의 5천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에서 위무위즉무불치(爲無爲則無不治),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능무위호(能無爲乎)라고 세 번 무위(無爲)를 역설했을 뿐이다.

노자는 본인이 생각하는 無에 대한 정의(正義)를 이 11장에 단적으로 꼬집어서 언급해 놓았다.

굴러가는 차의 바퀴위에 얹힌 우마차를 막론하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것은 바퀴의 살들이 한 군대로 모이는 곳, 즉 허브(Hub)이다. 이 허브는 빈 공간, 즉 아무것도 없는 無라야만 그 無에 거창한 차체(車體)를 꿰어 바퀴와 차체를 이을 수 있다. 만약에 이 허브가 바퀴살들로 차 있다면(=無가 아니라면) 차체는 바퀴와 연결되지 못하고 자동차는 굴러가지 못할 것이다. 자동차가 바퀴의 회전을 이용해 달리는 것은 바퀴의 살들이 모이는 곳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즉 無의 공간(空間)이 있기 때문이니, 이 無가 바로 쓰임(用)이 되는 것이다.

塇埴以爲器(선식이위기)에서 선식(塇埴)은 일종의 관용어로 ‘찰흙을 주무르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릇에 빈 공간이 없으면 그릇이 아니고 방에 빈 공간이 없다면 방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無란 실은 비어있는 공간, 꼭 있어야 하는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무위(無爲)란,

『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짜임새를 갖추는 것을 말함인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함이 되는 경지(境地)와 여건을 축성(築成)시키는 적극적인 의지의 구현』

이라고 해야만 될 것이다.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긁어 부스럼이 될 일은 만들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노자가 생각하는 무위(無爲)의 본질이다.

노자는 결론을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이라 했다.

“그럼으로 있다고 하는 것의 유리함이란 거기에 있는 없음이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떤 물건이든 빈 공간이 있도록 만든 부분이 있기에 빈곳이 생기는데, 이것이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면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필요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즉 비어있는 것은 그 물건이 만들어진 이래로 ‘없음’일진대, 있음이 유익해지는 것은 그 없음을 쓰는 작용을 통해 비롯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문장에서 노자가 말한 무(無)란, 유(有)로 인해 생겨난 것이 無이고 이때의 有는 無의 이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無의 개념은 결코 Nihil(허무, 무가치한)이 아니라 有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無는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有를 있게 해주는 가치를 가지는, 無라 불리는 또 하나의 존재인 것이며, 다시 말해 無가 있지 않고서는 有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餘說)

“삼십폭공일곡(三十輻共一轂)”에서 왜 30개의 바퀴살이 되어야 하는지의 근거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이론에서 비롯된다. 하도와 낙서에서 오행(五行)의 구도에 서로 약간의 상이한 점은 있으나 오행의 운행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도와 낙서는 공통적으로 자연 순환의 이치를 도식한 것으로서, 오행(五行)은 고유한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의 원리에 따라서 무한으로 반복하여 순환한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하도와 낙서의 오행설은, 진리 탐구에 있어 인간과 사물은 물론 천체에 대한 내용에까지도 다방면으로 응용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이론에 따르면 숫자 1에서 5까지의 수가 생수(生數)이고 6에서 10까지의 수를 성수(成數)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홀수인 1.3.5.7.9를 모두 합한 25를 천수(天數), 짝수인 2.4.6.8.10를 모두 합한 30을 지수(地數), 그리고 천수와 지수를 더한 55를 두고 천지대연수(天地大衍數)라고 별도로 불렀다. 옛날 사람들은 이들 숫자가 우주공간에서의 변화와 운행의 법칙을 구현한다고 생각했다.

30의 바퀴살 갯수는 지수의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수레바퀴의 살수가 30개인 것이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까지 수레가 없었고, 우마차(牛馬車)의 도입은 일제시대에 신작로(新作路)와 함께 시작되었다.

 

※ 현관(玄關)에 대하여 일반적인 국어사전에서는 "양옥이나 일식집의 들어가는 정면 문"이라고 해설하고 있으나, 이는 시대에 맞지 않는 설명이다. 지금의 주거형태는 아파트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국어사전에서의 현관은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한편 옥편에서는 현관 개념을 불교와 연관지어 “불도(佛道)를 깨닫는 문 또는 현묘(玄妙)한 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국어사전과는 또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노자(老子)의 서물(書物, 도덕경)에서의 玄자는, 사전적인 검다는 의미보다는 깊고 아득하여 알 수 없다는 의미이고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글자 차체로 오묘하고 심오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1장의 원문에서 오묘할 묘(妙)와 돌아다닐 요(徼)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이 바라보면 오묘함을 보게 되고, 바람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천체에 적용해보았을 때 이 둘은 똑같이 블랙홀(Black Hole)을 의미하지만, 이름도 서로 다르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어 玄(현)이라고 부르게 된다. 또한 그 문이 참으로 깊고 오묘한지라 우주 삼라만상이 드나드는 문, 즉 衆妙之門(중묘지문)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보면 현관이라는 말은 삼라만상이 왕래하는 중묘지문이라는 참으로 오묘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에도 동양철학의 세계와 고전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본서에서 현관(玄關)은 노자 저서(著書)의 관문(關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활기 정신건강증진연구원장 철학박사 임주완>

<齊和 노장사상연구소장>

<活起 풍수원구원 대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