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의 과거와 현주소

 한나라 청오자의 <청오경>이 공식적인 인류 최초의 풍수지리학 서적으로 전해진다. 진나라 때 곽박이 지은 금낭경이라 불리는 <장경>은 오래 되었으면서도 권위있는 고전에 속한다. 풍수지리의 중흥조는 당나라 양균송으로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였고 그 이론과 실제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알려주는 데로 무덤과 집터를 잡으면 곧바로 가난을 면했기 때문에 구빈선생(救貧先生)이란 별호를 얻었다. 그는 풍수지리학의 핵심원론을 정립하였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청낭서> <청낭경> <청낭오어> <천옥경> <도천보조경> <감룡경> <의룡경> <장법도장> <금함경> <조명천금가> 등 십수편의 저서를 완성하여 풍수이론의 세로운 체계를 세웠다. 청나라 초기인 건융제 때 여러분야에 대한 약 8만권에 달하는 보존가치가 있는 서적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풍수에 관한 서적이 총 11권인데 그 중 양균송의 저서가 5권이 포함되었다. 특히 양균송은 그의 제자인 증문천, 요금정과 함께 조성한 중국풍수문화의 성지인 '삼료촌 마을'을 풍수술법에 의거하여 조성해 놓았다. 이곳에서 풍수사상을 정리하고 완성하여 제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남겨놓은 뚜렷한 유적과 업적들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이 마을엔 증씨와 요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대대로 풍수 명사들을 배출하여 대륙의 여러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풍수지리의 중흥조로 신라말 도선국사를 꼽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승려와 도반들에 의해 풍수적 길지를 선택적으로 적용해 왔음이 고대의 사찰이나 마을 입지 그리고 무덤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왕실은 물론 민간인에까지 풍수지리가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실례로 조선시대 민간인 간의 소송의 절반이 풍수길지와 관련된 다툼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고려조의 서운관에 이어서 조선조에서도 과거제도에 잡과라고 하여 천문, 인사, 지리분야의 인물을 뽑아 관상감에 배속시켜 근무케 하였다. 나라에 국상(國喪)이 나면 지관(地官)이라는 임시직 관리를 선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풍수지리는 미신 비슷한 취급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첫번째 사유는 조선조 말까지 풍수 혜택을 받지 못한 민중계층(평민, 노비)에 의해 부정적인 의도로 회자(膾炙)된 탓이다. 두번째 사유는 서양종교(예수교)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기존 풍습과 양속을 터부시하고 미신취급한 것의 영향이 컸다. 세번째 사유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민족말살 정책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여러 사정상 지금도 풍수지리학은 사주명리학과 더불어 적극적이고 양성적 활동보다는 음성적으로 성행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요즈음 서양에서는 한의학과 대체의학 분야가 상당히 활성화 되고 있듯이 풍수지리학 또한 북미를 중심으로 하여 팽슈이(feng shui, 양택풍수)가 사회저변에 매우 활발하게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클린턴 정부 때 백악관을 팽슈이 전문가로 부터 조언을 받아 인테리어로 처방했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우 부동산을 개발하고 시가지나 빌딩 신축시 풍수사의 자문을 필수과정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에서는 건축행위시 관계법령으로 풍수사의 역할을 명문화 시켜놓은 나라도 있다.

 

 작금에 지구상의 실상은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지 않는 등 여러가지로 안타까운 현상들의 연속이지만 이 혼돈의 시기는 몇 년내로 변화가 올 것으로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활기 정신건강증진연구원장 철학박사 임주완>

<齊和 노장사상연구소장>

<活起 풍수원구원 대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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