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가리지 않는 포근한 큰집안방’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형성되는 삶의 과정들은 감각과 인식의 그물을 거쳐 사람들의 가슴 속에 머물러 있다가 죽음과 더불어 강물처럼 흘러가버린다. 뒤에 남은 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머릿속에 되살려보려 하지만 빈 터에서 그림자밟기라 구체적인 형상이 잡히지 않는다. 다행히 요사이에 와서는 언론이나 여러 사람들의 기록 외에도 영상문화가 발달하여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리 광주에서는 박선홍선생 같은 분이 계셔서 지난날의 사건과 풍속 같은 것을 놓쳐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도움을 주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고 있다.

다방문화는 근대화의 물결을 따라 우리들 삶 속으로 파고들어와 애환을 엮어내며 소통과 사교의 무대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복다방’‘판문점다방’‘금잔디다방’‘카톨릭다방’‘Y다방’ 등 수많은 다방이 있었지만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그 가운데 옛 전남일보사 건물의 지하에서 반세기를 버티고 있는 전일다방은 불원간에 다가올 운명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지금도 아가씨 한 사람이 정감 넘치는 미소로써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홀연히 광주에 나타나 언론사업에 뛰어든 남봉(南鳳)이 몇 개 신문사를 거쳐 전남일보를 창간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금남로 5가에서 2가를 거쳐 1가의 1번지에 정착한 것은 1960년대의 일이었고 초기에는 사장이 손수 기사를 쓰면서 식자를 하고 편집을 하는 등 만능을 과시하며 호남신문 동광신문 광주신보 등을 제치고 68년 12월 드디어 10층에 이르는 고층빌딩을 세우게 된다. 시민들과의 소통의 창구를 필요로 했던지 하필이면 지하 일층에 다방을 차릴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명칭으로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전일다방>이었으니 경영자가 지니고 있는 카리스마에서 뻗어나온 소유형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내가 전일다방을 맨 처음 찾은 것은 전남일보의 문화부에 계시는 허연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외람되이 편집국 같은 곳은 범하기가 두려워 다방에 앉아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님은 못 다한 일이 남아 있는 듯싶었지만 곧장 뛰어내려왔다. 50년대 초 현대문학을 통해 맨 먼저 등단한 선생님은 훈장의 자태를 벗지 못한 샌님으로서 세인들이 인식하는 기자가 아니었다. 나 역시 얼마 전 어느 언론에 발을 들여 놓고 출입처를 돌아다니다가 보니 맞이하는 눈초리들이 서먹한 것을 느끼고 사흘을 견디지 못해 꽁무니를 빼버렸던 처지였다. 선생님한테서는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빼면 우쭐대기는커녕 자시하는 폼이 눈에 띄지 않는 편하디 편한 분이었다. 그런 인품에 내근에만 매달려 있으니 누구 하나 떡값 한 푼 던져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어 마감 시간이 되어 외근기자들이 돌아오면 어울려 나가 막걸리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는 처지라고 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들고 온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막걸리집으로 옮겨 대폿잔을 기울이는 일이 관례였지만 생계의 해결책을 찾는답시고 정치 같은 것에 몸을 적신 것은 체질에 맞지 않은 일이었고 “나 북간도 가네.” 하는 비명을 남기고 미국으로 건너가버렸으니 광주는 매정하게 선량한 한 사람의 시인을 방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인활동을 같이 했던 이해동선생도 있었다. 해방직후에 나온 조선중보 현상에 응모한 <다듬잇소리>가 이은상씨의 눈에 띄어 호남신문사에서 문화부 일을 맡아 일을 했던 선생은 서정성 넘치는 좋은 시를 썼다. 몇 년 전 서울에서 고은씨를 만났더니 삼사십년 전 승려의 몸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광주에서 읽었던 이해동선생의 시 <이창(裏窓)>을 기억하고 있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카페와 다방은 어떻게 다를까? 다 같이 커피를 파는 집이래서 내용이 비슷한 명칭이 붙었겠지만 카페에는 젊은 사람이나 하이컬러한 사람이 드나들고 다방에는 나이가 지긋하거나 옛스러운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찾는 나름대로의 독립된 품격을 가지고 가난하고 쓰라린 세월을 존재해 왔는데 요사이의 다방은 예 같이 않게 노년들의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유학을 떠난 대학생이 카페에서 만난 아가씨의 슬픈 사정을 듣고 부모한테서 보내온 학자금을 몽땅 헌납한 다음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는 순정담이나 다방의 마담에게 반하여 부모가 선택해 준 아내를 버렸다는 놈팡이의 탈선을 비난하는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그것은 카페나 다방의 죄가 아니라 냉혈 아닌 따뜻한 피를 몸속에 돌리고 있는 인간의 가슴이 빚어낸 결과일지니 어찌 부도덕한 탕자라고 비난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광주일보나 전일다방을 드나들면서 느끼곤 하는 일이 있는데 화장실에 관한 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급박한 생리현상을 모르쇠로 외면하며 화장실에 자물쇠를 잠궈 놓거나 가로막으며 으스대는 빌딩 소유자들이 대부분인 세상에 넉넉한 치마폭을 가진 관대함에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그 이상의 적선이 없는 것이다. 온갖 구린내 지린내를 감내하고 있는 인내심은 5.18때 쫓기고 몰리는 시민들을 내 몸의 안위를 가리지 않고 안아 들인 포근함이 큰집 안방 같았었는데 요사이 들리는 소문에 뜯기네 헐리네 하는 소리가 가슴에 무늬를 긋는다.

그 정, 또 한 마디. 지난 87년 5층인가 7층에선가 만났던 이경인씨가 한 말이 생각난다. 도청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시위현장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소리가, “아! 나는 어째서 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외치지 못하고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을까.” 지금은 이승을 떠나버린 분의 선량한 탄식 소리가 날개를 달고 귓가를 맴돈다.

리명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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