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암저수지와 비슷한 크기


지금의 광주고등학교 정문 앞쪽에서부터 홈플러스 계림점 옆길까지 반원형으로 펼쳐져 있었던 경양방죽은 광주의 대표적인 저수지였다. 거울 같은 호수라는 뜻의 ‘경호(鏡湖)’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인공 호수로서, 문인들이 멋진 풍광을 노래하고 길손들이 나무 그늘에서 쉬던 곳이었다. 광주사람들이 논밭에 물을 대던 방죽이요, 뱃놀이와 휴식을 즐기던 유원지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심하게 오염되고 1968년에 완전히 메워진 뒤, 주택지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경양방죽은 오늘날 계림1동 주민들이 추진하고 있는 ‘추억이 깃든 경양마을 만들기’ 사업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시민의 소리 스토리텔링사업단 작가들과 더불어 이 사업에 참여해 경양방죽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했다. 경양방죽 스토리텔링이 광주의 역사·문화적 자산을 늘리고 경양마을 주민들의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광주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경양방죽은 조선의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대왕 때는 흔히 태평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해마다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세종대왕은 금식을 할 정도로 가뭄 대책에 골몰하였고 방죽의 축조와 보수에 힘썼다고 한다.
광산 김씨 문중에서 대대로 전해져온 구전1)과 <광주군사(光州郡史 : 1933년)>2)에 따르면, 경양방죽은 세종 25년(서기 1443년) 전라감사 김방(金倣)이 백성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김방이 광주목사였다는 설도 있지만, ‘쌍봉사 사적비(1786년)’와 김방 영정의 화기(畵記)로 보아 전라감사(전라도 관찰사)였음에 틀림없다. 다만, 세종 24년부터 28년까지(1442~1446) 전라감사는 배환이었으므로 경양방죽은 1442년 이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의 어머니 축조설 등 전해와
그러나 고대 축조설도 있다. 1902년 6월 9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경양방죽은 신라·백제 때 만들어져 조선 시대까지 여러 번 보수하여 내려온 저수지들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고대 축조설을 뒷받침해 주는 전설도 있다. 후백제왕 견훤의 어머니 남원부인이 광주의 부자로서 북촌에서 살았는데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기 직전인 신라 진성여왕 때 극심한 흉년을 맞아 광주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관개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전설이다.3) 만일 이러한 고대 축조설이 사실이라면, 세종 때에는 전에(1415년) 벽골제 보수 공사 감독을 맡았던 김방이 경양방죽 보수 공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경양방죽은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져, 오랜 세월 동안 드넓은 논밭에 물을 대 주었다. 1932년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경양방죽은 전답 4백 정보(120만 평, 3,966,942㎡)에 물을 댔다고 한다.4)

▲ 공중에서 본 경양방죽(옛 전남일보 1967.4.30)와 경양방죽에서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1967.1.5) 사진제공 광주일보

120만평의 논에 물 공급
경양방죽의 ‘경양’이라는 이름은 고려 때부터 조선 말기인 1895년까지 나라의 교통시설이었던 ‘경양역(景陽驛)’ 또는 ‘경양도(景陽道)’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5) 경양방죽은 사라져 버렸지만, ‘경양’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경양로’에 남아 있고, 계림1동이 한창 가꾸고 있는 ‘경양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경양방죽은 ‘경양언(景陽堰)’, ‘경양방축(景陽防築)’, ‘경양호(景陽湖)’, ‘경양지(景陽池)’, ‘경양제(景陽堤)’, ‘금교방축(金橋防築)’, ‘금교제(金橋堤)’,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라고도 불리었다. 이 밖에도 현대의 여러 책과 지도에는 경호영지(鏡湖影池), 연지(蓮池), 영지(影池), 경지(景池), 금호(錦湖), 큰방죽 등의 별명이 나온다.

수양버들 우거진 두 개의 섬
경양방죽에는 수양버들 우거진 섬 두 개가 있었고, 잉어나 붕어, 가물치가 많아 사람들이 낚시를 즐겼다. 길이 1천 미터, 폭 10미터 쯤 되는 둑에는 제방을 보호하고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둑방길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팽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귀목나무, 왕버들나무 등이 우거져 사람들은 그늘에서 놀기도 하고 산책도 했다.
그러나 1930년, 대륙 침략을 위해 미쳐 날뛰던 일제는 경양방죽을 비행장으로 만들려고 후보지로 조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광주천 정리를 빌미로 경양방죽의 수원인 광주천의 보를 없애버리는 등 경양방죽을 없애려고 획책하였다. 경양방죽의 절반을 매립하여 주택지로 조성하려고 전라남도 농무과에서 설계까지 했다.
1934년, 일제는 광주의 도시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야지마 전라남도지사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경양방죽 매립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일제는 이 땅에서 제 나라 건국을 기념하는 ‘신무(神武) 기원 2,600년(서기 1940년) 기념사업’으로, 지금의 광주고등학교와 계림초등학교 일대에 있던 산인 경호대를 헐어 그 흙으로 경양방죽을 메우고 일본인 주택지를 조성하려 했다.
그 당시 광주의 조선인 부읍장이었던 박계일 씨는 서석병원 최영욱 원장을 찾아와 이러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최영욱 원장은 곧 자신의 형 최흥종 목사와 상의한 뒤, 다음날 동아일보 광주지국장 김용환 씨를 비롯한 유지들과 논의했다. 그 결과 광주의 유지들은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해 투쟁하였다. 위원장으로 추대된 최흥종 목사는 전라남도지사와 광주읍장을 찾아가 매립반대 진정서를 제출했다.6)

▲ 광주읍지 지도 속의 경양방죽(왼쪽 가운데 부분의 원형 매립 '鏡湖')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 결성
그는 경양방죽 매립을 반대하는 이유로, 첫째 경양방죽이 “오백 년 역사를 가진, 광주 민생과 직결되는 농업경영의 원천지”라는 것을 들었다. 둘째, “광주천의 범람과 폭우가 쏟아질 때, 장원봉·두암·각화·풍향·경양 일대의 물을 저수지로 이끌어 완만히 흐르게 함으로써 홍수의 피해도 막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한 민족 한 지방의 역사적인 유산을 무자비하게 말살해 버리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고 질타했다. 그는 “장차 대도시 건설을 위해서는 경양지 만한 저수지는 전에 있던 그대로 보존해야 하며, 풍치 지구로 미화·정비할 필요가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6년 11월, 주택지 조성을 명분으로 경양방죽 매립을 허가하고 매립공사를 강행했다. 다만 조선사람들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경양방죽의 약 30%를 남겨둔 채, 매립공사를 1938년 4월 18일에 착공, 1939년 3월말에 준공했다. 풍암저수지와 비슷한 규모였던 65,418평(216,259㎡ : 1912년 지적원도상 면적)의 약 70%인 45,531평을 메워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수로를 제외하고 저수지가 18,832평(62,255㎡)으로 줄어들었다.
경양방죽을 매립하기 전인 1935년, 광주읍은 부(府)로 승격을 앞두고 도시확장 계획을 세운 가운데, 경양방죽을 시내로 편입하고 방죽 주위에 화초를 재배하고 신작로를 만들어 유원지로 삼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유원지 조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원래 있었던 생태적인 유원지를 파괴하는 기만적인 도시계획이었다.

1940년 보트장 생겨
일제는 경양방죽을 매립하면서 수백 년 동안 울창했던 경양숲을 훼손하고 경양호 안의 섬들마저 없애버렸다. 1940년 4월, 일제가 경양방죽 18,832평을 광주부에 ‘유원지’ 목적 공유수면 점용 허가를 해줌에 따라, 1941년 보트장 등이 생겨나 경양방죽 전체가 유원지로 바뀌어버렸다.
주택가와 인공 유원지가 들어서자, 경양방죽은 급속히 오염되어 갔다. 일제에 의해 경양방죽의 71%가 매립되어 호수가 줄어든 후, 생활하수만 흘러들어 썩은 물이 고이게 되었고 1964년 무렵부터는 아예 광주시의 쓰레기통으로 변해 버렸다.7) 게다가 해방 후 농촌에서 많은 인구가 들어옴에 따라, 집 없는 사람들이 경양방죽 주변에 모여 살게 되면서 호수는 더욱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할 지경이 되었다.
1967년, 광주시는 수원 기능 약화와 수질 오염, 택지 개발을 이유로 경양방죽 매립 계획을 세웠다. 광주시가 경양방죽을 정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오직 매립만 추진하다 보니, “택지를 개발하려고 도리어 오염을 방치하고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큰 반발 없이 1967년 5월부터 1968년 12월까지 두 번째 매립 공사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의 중요한 역사유적인 귀중한 호수가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광주시는 지금의 광주역 근처에 있었던 태봉산을 헐어서 그 흙으로 경양방죽을 메웠다. ‘광주의 여의주’인 태봉산을 없애면 광주에 큰 재앙이 올 거라고 수군대는 목소리도, 태봉산을 보존하여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들의 여론도 묵살되고 말았다. 1968년 9월에는 경양방죽 매립지에 새 시청사를 착공하여 1969년 10월에 완공했다. 경양방죽 터 계림동 505번지에 시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광주역 앞 태봉산 헐어 경양방죽 메워
경양방죽은 일제에 의해 대부분 매립되고 개발의 논리에 따라 나머지마저 사라져 버렸지만,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 주었다.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던 민생을 살리고자 만든 경양방죽의 역사에서 민본주의 행정의 모범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양방죽 축조 공사를 통해 광주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모두 나서고 대동정신으로 하나가 된 모습에서 의향(義鄕)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글쓴이 정의행(사회적기업 이야기통 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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