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10시 15분 114주년 행사 개최
지방자치단체행사가 아닌 국가행사로 거듭나야
젊은 세대들의 역사 체험장으로 재 탄생하길 기대

<안중근 의사 해동사 위패 봉안식(1955.10.27.) 장흥군 제공>

 

기자가 광주에서 출발할 땐 맑지는 않았지만, 흐릿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어 오늘 행사가 잘 이루어지려는 구나라는 안도했는데 행사 시작 전부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그칠 줄 몰랐다.

의사의 억울함일까? 분노일까? 외침일까? 하늘도 울었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짜로 벌써 114주년 되는 해이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통감으로 한국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여섯 차례의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14주년 행사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 시간인 10시 15분에 장흥군 장동면에 있는 해동사에서 안 씨 문중과 기관사회단체, 지역주민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전통 제례를 시작으로 추모사, 안중근 약사보고, 유언 낭독, 참배 등의 식순으로 비가 내리는데도 어느 참석자 하나 떠나지 않고 의사의 114주년 행사를 지켜보았다.

해동사는 1955년 장흥군 죽산안씨 문중과 장흥지역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을 했다. 당시 죽산안씨 문중은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당을 짓고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처음 지은 해동사는 사방 두 칸 팔 각도리 사모지붕 집으로, 두 칸이지만 앞면과 옆면 한쪽은 퇴 칸이어서 신실은 사방 한 칸의 규모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상부에 겹지붕을 두고 있으며 최상단에는 철제 장식물이 설치되어 단출하지만, 위엄이 있다.

사우에는 당시 대통령 글씨로 알려진 ‘해동명월(海東明月)’이 전해 온다. 안에는 안 의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안 의사의 친필 글씨 3점의 영인본이 액자로 걸려 있다.

해동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 있는 어느 작사가와 고흥의 안씨 성을 가진 독지가, 장흥 안씨 문중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조항조의 해동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동사를 알리 위한 플래시몹 등 다양한 홍보 방법들도 동원되었다.

해동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지자체인 장흥군에서도 해동사 복원 및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 등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국가보훈부에서 현충 시설로도 지정이 되어있다.

다만 아쉬운 건 행사 진행 때 이 행사가 있게 만든 안씨 문중을 먼저 소개하고, 그다음 기관사회단체를 소개하면 좋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는데 약 3분여에 걸쳐 장흥군에 있는 기관사회단체장들과 의원들을 꼭 소개해야만 했겠느냐는 아쉬움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년 행사는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을 하신 의사를 추모한 자리이며 행사이다. 보여주기식 행사는 지양해야만 하며, 후손들은 이러한 의사의 헌신 정신을 망각해선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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