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미국과 2024년 한국의 비교

뉴스포털1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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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을 다른 말로 표현 해봤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국민을 섬기지 않는 나라 안에서 부패정치,부패언론,부패사회가 당연 시 되고, 나쁜 것이 위에서 아래로 번지는 나라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은 물란해도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면 ‘명예’다. 한국은 명예가 중요하지 않는 나라다. 일본이 강한 것은 자존감이나 명예가 강하기 때문에 국력이 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타인의 의존과 민주의식 결핍 속에서 갈수록 자존감과 자존심이 심하게 하향하는 좀비 국가이다라고 말해도 반문할 사람이 거의 없는 국가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 나온다고 거짓 포장에 헌법을 가장 잘지켜야 하는 위정자 집단은 금력과 권력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집단인줄 누가 모른단 말인가?

오로지 돈만 있고, 나만 잘살면 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가 잘못 물들어 한국 자본주의는 곪아터진 상흔에 국가를 이루는 시민들이 반성과 발전이 필요한 시기이다.

1882년 미국과 2024년 한국 현재의 비교

미국 루스벨트라는 사람은 1882년 1월 30일에 미국 뉴욕주 북부의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는 2024년인데도 미국 1882년만도 못하는 자유민주주의 찌그레기 속에서 혼돈과 절망으로 지식인이 병들어 장애가 된 나라다.

루스벨트라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1945). 민주당 출신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New Deal)’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혁신가 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은 법이라는 단어가 있으나 마나한 민주가 사치스런 나라다.

‘법’ 위에 아무나 있고 ‘법’ 아래 시민을 둔 나라가 한국사회이다라고 나는 단언 한다.

정치인은 정치라는 단어에 걸맞게, 지식인은 지식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경제인 인라면 경제인에 걸맞게, 부자라면 부자에 걸맞게 행동을 해야 사회가 바로 돌아가는데 하나같이 썩은 쥐의 배에서 꿈틀거리는 벌래처럼 기생을 하는 우리사회에 나는 돌을 던진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루스벨트 인물설명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영어: Franklin Delano Roosevelt, FDR,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1933년부터 194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의 32대 대통령을 역임한 미국의 정치인이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뉴욕주의 상원의원, 1913년부터 1920년까지 해군 차관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제44대 뉴욕 주지사이었다.

루스벨트는 그로튼 학교, 하버드 단과대학과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에 다녔으며, 뉴욕시에서 지속적으로 법률 업무를 수행했다.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아래에서 해군 차관보를 역임했다. 루스벨트는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한 제임스 M. 콕스의 부통령 후보였으나, 콕스는 공화당의 워런 G. 하딩에게 패배했다. 1921년에 루스벨트는 중풍으로 인해 다리가 영구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192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여 공직에 복귀했고,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주지사에 역임하며 당시 미국을 뒤덮고 있던 대공황 퇴치 프로그램을 홍보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공화당의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를 압승했다.

루스벨트는 재임 첫 100일 동안 전례 없는 연방 입법을 주도하고 뉴딜 정책을 시행하는 수많은 행정 명령을 쏟아냈다. 실업자와 농부들에게 구제를 제공하기 위한 국가회복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과 기타 프로그램들을 통해 경제 회복을 추구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금융, 통신과 노동과 관련된 주요 규제 개혁을 도입하면서 미국 금주법 시대의 끝을 알렸다. 루스벨트의 정책으로 1933년부터 경제가 급속히 개선되면서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1937년과 1938년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졌고, 1937년 사법 절차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실패했다. 또한 1937년에 결성된 보수 연합은 추가적인 뉴딜 프로그램과 개혁의 실행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성공적으로 당선되며 두 번 이상 재임한 유일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1938년 이후 일본의 중국 침공과 나치 독일의 침공에 더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자 루스벨트는 중국, 영국과 소련에 외교적,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루스벨트는 그 다음 날 일본에, 며칠 뒤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이끌기 위해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루스벨트는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 동원을 감독하고 유럽 우선 전략을 구현했다. 또한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으며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국제 연합과 기타 전후 기관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4년에 재선에 성공했지만 전쟁 동안 신체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꾸준히 약화되면서, 결국 1945년에 사망했다. 루스벨트의 죽음 이후, 일본계 미국인 억류와 같은 루스벨트의 몇몇 명령들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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