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일본교수회 부학장 강신영
사무라이에 길들여진 복종의 DNA

 사무라이에 길들여진 복종의 DNA

지난 2022년 6월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플랜75」를 제작한 하야카와 치에(早川 千絵) 감독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받아 부산을 방문했었다. 치에 감독은 영화상영에 앞서 실시한 인터뷰에서 “일본인은 국가가 정한 것을 바꿀수 없는 국민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일본내 노령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재원 조달에 한계를 느낀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안락사를 권장한다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다. 일본은 1970-8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과 의료기술 향상으로 고령인구가 급속히 늘어난데다 복지예산은 폭증함에 따라 국가부채가 GDP 대비 250%를 초과(2021년 기준)한 상태이다. 미국 133%, 프랑스 116%, 중국 69%, 이탈리아 155%, 그리스 207%, 한국 51% 수준이므로 일본의 국가부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수 있는데 이 영화는 오늘날 일본에 드리우진 어두운 단면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점은 극중에 등장하는 고령의 주인공이 죽음을 권하는 국가정책에 순응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타 국가에서 영화의 내용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다고 가정하면 과연 당사자들이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순순이 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국가에서 후손들과 국가장래를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설득한다해도 당사자들은 물론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해 인륜을 저버린 정책이라고 크게 반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속에 등장한 일본 국민들의 행동은 달랐다. 일본에서 장기간 거주했던 필자도 치에 감독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데 일본처럼 국가가 시행하는 정책이나 방침에 반발하지 않고 대체로 순응하는 국민성을 가진국가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일본 지하철역의 노인(출처 : 언스플래쉬)
일본 지하철역의 노인(출처 : 언스플래쉬)

한마디로 일본 국민들은 국가정책에 순응하는 일종의 복종의 DNA를 가진 국민이라고 할수 있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대지진(東日本大地震)을 떠올리면 어느정도 수긍이 될 것이다. 당시 대지진으로 인해 무려 2만 2천여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해 세계각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그런데 각국 국민들이 놀란 것은 또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 국민들이 재해현장에서 보여준 너무나도 침착한 태도였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비록 지진과 홍수같은 천재지변이라 할지라도 그정도 규모의 대형 재해가 발생할 경우 이재민들의 정부에 대한 원성과 비난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정부에 대해 그다지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재해이므로 그누구도 어찌할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수라장같은 재해현장에서 너무나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텔레비전화면을 통해 전세계에 중계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의아심을 갖게할 정도였다.

일본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그정도의 엄청난 재해가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될지 대충은 짐작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2005년 8월 미국의 카트리나 하리케인 참사 당시 1천 2백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부시 정부의 대응에 대한 이재민들의 반발은 매우 컸으며 뉴올리언스지역은 상당기간 무정부상태에 빠질 정도로 혼란이 지속되었다. 오랫동안 뉴올리언스지역에서는 무장폭도가 발생하고 약탈과 각종 범죄가 횡행하는 등 시민들의 절망과 분노는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또한 2018년 9월 인도네시아 슬라웨시섬에서 발생한 강진과 쓰나미로 인해 1천 2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에도 교도소 탈옥과 더불어 일부 지역에서는 상점 약탈사태가 벌어지는 등 무정부상태에 빠졌었다. 그런데 동일본대지진에서는 이보다 수십배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가옥 40만여채가 피해를 입고 최대 250조원의 재산피해를 입는 엄청한 재해를 당했음에도 일본 정부에 대한 원망의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인간으로서는 어찌할수 없는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체념과 무력감이 일본사회를 지배했을뿐 정부를 비난하거나 행정관청에 책임을 돌리는 행위는 일부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또 한가지 사례를 살펴보자면 2016년 4월 부산에서 가까운 지역인 구마모토지진(熊本地震)으로 10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에도 지진현장을 방문한 아베 총리에 대해 항의하거나 욕설을 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일본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의 눈에는 다소 의아스러운 풍경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은 왠만한 일로는 남에게 탓을 돌리지않고 오히려 자기탓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절제되지 않은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은 주변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일본인들의 국민성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을 유추해 볼수 있겠지만 에도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도하에 형성된 사무라이들의 행동양식에서 해답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센코쿠시대(戰國時代)이후 전쟁이 사라진 에도시대에 계급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것은 사무라이 계급이었는데 그들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내세운 것은 사무라이로서의 체면과 자부심이었다. 상공업자 혹은 지주(地主)처럼 재물은 없을 지언정 이들에게 군림하면서 행정과 치안을 책임지는 관료로서의 자긍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라이들의 과도한 자부심은 때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엉뚱한 만용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사농공상의 신분제하에서 사무라이들에게는 두가지 특권이 허용되었는데 첫째는 사무라이의 상징으로서 두자루의 칼을 허리춤에 차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는 ‘키리스테고멘’(斬り捨て御免)이다. ‘키리스테고멘’은 ‘부레이우치’(無礼討ち)라고도 불리는데 사무라이 계급에게 허용되었던 권리의 하나로서 ‘칼로 베어도 면죄’라는 뜻이다. 이를 테면 사무라이가 하층민에게서 참기 힘든 굴욕을 당했을 경우, 상대방을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 사무라이들만이 누릴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사무라이 계급은 체면을 중시하였고, 굴욕을 당하고 그냥 물러나는 것을 무사로서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이는 사무라이 주변의 평가나 관직에도 영향을 미쳤고, 때에 따라서는 당사자가 무사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무사에게 체면을 지키는 것은 사활의 문제나 다름없었다.

당시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들의 권위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칼이 잘 드는지를 시험하기위해 장난삼아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단칼에 베기도 했다는 믿기어려운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반 백성들은 사무라이에게 자칫 불의의 봉변을 당하지 않기위해 사무라이가 행차하면 굽신거리거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한편 사무라이에게 특권이 용인된 밑바탕에는 사무라이는 명예를 목숨같이 여겨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백성으로부터 모욕을 당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간혹 사무라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사무라이가 행차하는데 멀뚱멀뚱 쳐다보며 예의를 표하지 않는 백성을 무례하다면서 칼로 위협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볼수 있다. 그렇다고 막부가 사무라이들이 백성들 위에 초법적으로 군림하고 안하무인처럼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각지의 다이묘(大名)들로서는 사무라이들이 중요한 존재이긴하나 평상시 세금을 납부하고 유사시 전쟁이 나면 징병대상이 되는 영민(領民)들도 소중한 자산으로서 영지를 운영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사무라이들이 정당한 명분없이 영민들을 괴롭히거나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엄중히 금지하였다. ‘키리스테고멘’은 어디까지나 영지를 다스리는데 핵심역할을 하는 사무라이들의 권위를 지켜주기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이를 집행하는데는 엄격한 기준과 명분이 필요했고, 반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가는 사무라이가 처벌을 받게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처럼 권력자들의 밑에서 행정사무를 집행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란 존재는 영민들로서는 함부로 쳐다볼수 없는 두려운 존재 그 자체였다. 사무라이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이어 청일전쟁(淸日戰爭)과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등을 거치면서 국가공무원으로 변신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지금의 공무원들을 ‘양복입은 사무라이’로 칭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와는 달리 일본 국민들은 일선 행정기관에서 공무원을 상대할 때 상당히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에도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져온 사무라이에 순응하는 DNA가 지금도 뇌리 한구석에 박혀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엘리트관료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류대학 출신 공무원을 대하는 태도보다 훨씬 높다고 할수 있다. 일본 국민들은 도쿄대학을 졸업해 일본의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霞が関)에서 일하는 관료들에 대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자신들보다는 한수위의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다. 일본 속담에 「이치모쿠오쿠」(一目置く)란 표현이 있는데, ‘자기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으로 인정하여 경의를 표함’이란 뜻이다. 일본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솔직히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들보다 관료들이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관료들이 추진하고 집행하는 정책들에 대해서도 신뢰와 믿음을 갖고 있다. 일본인들은 전후 일본이 잿더미에서 벗어나 기적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고 1970-80년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모두가 뛰어난 관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대체로 믿고 있다. 이러한 관료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정부에서 어떠한 정책을 시행하더라도 별다른 반발의 목소리가 없으며 대다수가 복종하고 따르려는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일본인들처럼 다스리기 용이한 국민이 없는 셈이다. 일본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복종성향은 일본정부에서 최근에야 도입해 시행중인 「마이넘버카드」를 보면 대략 짐작할수 있다. 「마이넘버카드」는 한국의 주민등록증처럼 일본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고유 번호가 새겨진 신분증을 지칭한다. 일본이 거액의 예산을 투입해 마이넘버카드 사업을 강행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국민 전체를 번호로 인식할수 있는 시스템이 여태껏 구비되지 못해 생긴 갖가지 비효율성 때문이다.

한국의 주민등록등본과 유사한 주민표를 발급받으려면 주소지 관할 구청까지 가야만 하는 것은 사소한 불편에 불과하다. 전지구적인 재난이었던 코로나19에 봉착하자 확진자를 집계하는 것도, 백신을 접종하는 것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과정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의 후진적 디지털화가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자 일본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2016년에 들어서야 시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만약의 가정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지금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새로이 시행하려 한다면 사생활 보호와 개인정보 유출 등을 우려하는 여론의 반대로 인해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1960년대말 치안 유지와 국가안보 위해요인 차단 등을 명분으로 일찌감치 시행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사생활 보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2000년대이후 도입하려 했다면 커다란 반발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일본도 도입 단계에는 시민단체와 야당의 반대가 있었고 아직도 신청율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지만 국민들이 나서서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은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에 관해서도 일본국민들은 유사한 반응을 보여왔다. 일본의 시민단체와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등이 원전사고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추궁하고 반발하고 있지만 정작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정부의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고 단체행동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인들의 국가에 대한 순응자세는 260년간 이상 사무라이의 칼과 권위에 억눌러 오다가 중일전쟁(中日戰爭),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등을 계기로 군부와 관료로 옷을 갈아입은 사무라이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전후 혼란기를 틈타 경찰과 관료로 재탄생하게 되었고 이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는데 이를 지켜본 국민들로서는 겉모습만 달라졌을뿐 사무라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어떠한 지시를 하달하거나 정책을 집행하든 순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전통발효식품학  강신영 교수 /전통발효명인  제2023-명인-0086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전통발효식품학 강신영 교수 /전통발효명인 제2023-명인-0086

#한국전통음식학술연구소#자르끄르요리연구소 대표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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