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욱의 마이스터 이야기] 귀농한 농학박사 천춘진 애농 대표
[김연욱의 마이스터 이야기] 귀농한 농학박사 천춘진 애농 대표
  • 김연욱 마이스터연구소 소장
  • 승인 2015.11.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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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차 산업 우수사례 경진대회 대상 수상
천춘진 애농 대표가 어린잎 채소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연욱의 마이스터 이야기] 농촌 청년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빠져나갈 때, 그는 오히려 농촌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일본에서 농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인재(人材)가 농촌을 지키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전북 진안에 귀농해 11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천춘진(45) 애농(愛農)영농조합법인 대표 이야기다.

천 대표는 농촌에서 태어나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 채소 전문 농학박사다. 그는 올해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열린 ‘6차 산업화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대상을 받았다. 지난해 28억 원의 매출로 2015년 6차 산업화 전국 최고의 모델로 우뚝 섰다. 농업이론 뿐 아니라 농업경영도 ‘박사’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이제 농업에서 이론과 실기를 두루 갖춘 최고 베테랑이다. 그러나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 일본 냉해로 농업 중요성 깨달아

천 대표는 고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농촌에서 자란 탓일까. 장차 꿈도 막연하게 농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농업고와 농업 관련 대학에 가서 나중에 농사를 짓기로. 계획대로 그는 전주농고와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現 천안연암대학) 원예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천안연암대학에서 1년에 두 명씩 일본에 유학을 보내주는데, 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1992년, 그의 일본 유학은 시작됐다. 일본 도쿄(東京)농업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달리 그에게 유학은 달콤한 생활이 아니었다.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 2시50분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음식 배달 등을 하며 남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노력했다. 유학 기간 1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학비 및 생활비를 조달했다.

그러던 중 1993년 한여름, 일본 전역에 냉해가 몰아쳤다. 당연히 가을 쌀농사는 흉년이었다. 쌀이 주식인 일본 사람들은 국내에서 생산된 쌀을 구하느라 50~100m씩 줄을 서야 했고, 이마저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유학 당시 일본에 냉해가 왔습니다. 쌀값은 폭등하고 사람들의 심리는 매우 불안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생산한 쌀을 사려고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국내산 쌀이 턱없이 부족하자 태국산 쌀을 수입했는데, 이 쌀은 찰기가 없어 먹지 않고 버리는 일이 허다했죠. 단 한 번의 기상이변으로 식량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농업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미래에는 농업이 정말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죠.”

천 대표는 그때 ‘식량의 무기화’를 실감했다. 우리나라도 쌀을 제외한 곡물 95%를 수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이 소중하다는 철학이 그의 가슴에 새겨졌다. 농업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는 소중한 계기였다.

영농조합법인 애농 전경
◆ 새로운 농업 발전 위해 고향으로 귀농

세월이 흘러 천 대표는 2002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해 곧바로 가와다(川田)연구소에 취직해 친환경 농업자재개발 연구에 몰두했다.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2년간의 직장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생활에 싫증났다. 또한 잘 나가는 일본 농가를 볼 때마다 귀농의 결심은 더욱 강해졌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지? 내 나이 겨우 30대 초반, 아직 젊으니까 한국에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 귀농에 도전하는 거야.”

천 대표는 귀농을 결심하고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찬성이었다. 농업에 대한 남편의 소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힘을 보태줬다. 천 대표의 어머니도 선뜻 동의해줬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자립하는 생활습관이 강했기에 그를 믿었던 것이다.

마지막 난관은 처갓집. 처갓집에서는 적극 반대했다. 이미 처남이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농사가 무엇보다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 대표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천 대표는 처갓집을 설득하고 마침내 12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 땅을 밟게 됐다.

천 대표의 귀농은 2004년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에서 새로운 농업을 열어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제2의 인생에 도전한 것이다.

그는 고향인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로 돌아와 퇴직금 800만원으로 하나하나 준비했다. 많다면 많은 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창농(創農)을 하는 입장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이 돈으로 20여 평의 비닐하우스를 사고, 홈페이지 개설과 중고 트럭을 사고 나니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농장 이름은 농업을 사랑하고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애농(愛農)’이라 지었다.

◆ 영양 풍부한 ‘어린잎 채소’로 승부

그가 선택한 작목은 영양소가 풍부하고 날로 먹을 수 있는 어린잎 채소였다. 이 채소는 남들이 하지 않았고,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잘 자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어린잎 채소를 재배했던 곳은 경기도의 한 농가뿐이었다. 파종 후 2~3주 후면 수확할 수 있어 자금회전도 빠를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 잎 채소에 승부를 건 것이다. 어린 잎 채소는 큰 채소에 비해 비타민, 무기질 성분은 3~5배 많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농사를 짓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식단이 서구화되는 한국에서 샐러드용 어린잎 채소가 통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주위에서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일본 유학에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이게 뭐야? 못 배운 우리나 해외박사나 차이가 뭐 있나, 똑같지. 젊은 사람들은 다 농촌을 떠나고 있는 가운데 춘진이는 오히려 농촌을 지키겠다고 농촌까지 들어온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안타깝네….”

첫해 1,000만원의 매출을 냈지만 생활비조차도 부족했다. 설상가상 아내는 셋째 아이까지 낳아 산후 조리도 해야 하는데, 힘들었다. 천 대표는 돈이 없어 동네일을 도와주는 ‘품앗이’까지도 닥치는 대로 했다. 실업자 비슷한 처지로 이렇게 1년을 보냈다. 농사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지? 그냥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며 월급이나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걸.”

천 대표는 후회가 막심했다. 아내와 아이들 3명을 포함해 모두 4명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家長)이었지만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주저 않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도 없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만 했다.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재배방법의 문제점을 꼼꼼히 점검했다.

가격이 문제였다. 유기농 재배에 따른 높은 단가(1㎏당 3만원) 때문에 납품처 확보가 쉽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단가를 낮추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그는 씨앗의 파종 깊이, 물주는 양 같은 조건을 달리하면서 160여회에 걸친 재배시험을 했다. 다른 농민들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최적의 조건을 찾아낸 그는 같은 면적에서 어린잎 채소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한 연구를 시작해 수많은 실험 끝에 판매가를 상당히 낮출 수 있었고, 이때부터 매출은 늘기 시작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만에 납품단가를 종전의 절반 수준인 1㎏당 1만5000원으로 낮추었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듯 했다. 그러나 다른 복병(伏兵)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행착오 끝에 새싹과 어린잎 채소 재배에 성공했지만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판로가 마땅치 않아 사업을 접을 위기에 놓였다. 돌파구 마련을 위해 골몰했다. 그 방안으로 판로를 개척하고 자체적으로 소비처를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농가 레스토랑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기른 농산물을 직접 재료로 사용하고, 가공식품도 만들어 판매하기로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자신이 재배한 어린잎 채소와 진안군 특산물인 양파, 당근을 풍부하게 넣은 카레를 파는 ‘카레팩토리’ 식당이다.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농가 레스토랑을 만든 것이다. 이 매장은 100% 친환경 쌀, 양파, 고추, 새싹, 어린잎 채소 등 지역 농산물을 소비한다.어린잎 채소와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파와 같은 농산물의 판매 확대를 위해 카레 전문식당 가맹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레스토랑 사업도 실패의 쓴맛을 봤다. 오픈한지 1년이 채 안 돼 문을 닫고 말았다. 충분한 상권 분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어린잎 채소의 확산을 위해 서울에 샐러드 전문점을 차리고 진안군 내 생산된 친환경 채소로 녹즙과 샌드위치까지 판매를 시도했으나 연속 실패했다.

천 대표의 상심은 컸다.

‘세상 살기가 쉽지 않네! 앞으로 어떻게 살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도전해보기로 결심한다. 레시피를 다시 짜고 손님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카레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점에 착안해 어린잎 채소와 카레를 접목한 ‘융합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후 이 카레는 점차 입소문이 퍼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웰빙 바람도 카레팩토리가 확산될 수 있도록 한몫했다. 전주의 음식점, 예식장, 학교 등 40곳과 수도권 대형음식점 등에 납품이 시작됐다. 사업은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

천 대표는 현재 서울과 대전, 전주 등 7곳에서 카레팩토리를 직영과 가맹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카레팩토리는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가맹점당 한 달 매출액이 2,000만~3,000만 원에 달한다.

천 대표가 운영하는 어린잎 채소 재배시설은 첫해 20평 넓이에서 현재는 80여 동 1만여 평으로 늘었다. 400만 원에서 시작했던 매출도 10년이 지난 2014년도 카레팩토리 판매금액까지 합해 28억 원으로 늘었다.

천 대표는 현재 700여 곳에 농산물을 직접 공급하고 있다. 지난해 30t에 이어 올해는 50t의 진안 양파를 수매할 정도로 주변 농가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조합원들의 어린잎 채소와 새싹을 전량 수매하고 양파, 친환경쌀 등 지역농산물 소비 촉진에 앞장서며 안정적인 판로개척을 위해 가공, 체험, 교육, 레스토랑 등을 겸하며 지역공동체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

지금은 항암초, 유채, 보리, 겨자채, 다채, 소송채, 비트, 시금치, 양배추, 적케일, 브로콜리 등 다양한 어린잎 채소를 생산한다. 어린잎 채소는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영양의 보고(寶庫)다. 샐러드, 비빔밥, 김밥, 피자, 삼겹살 쌈용 등 먹는 용도도 다양하다.

천 대표는 올해 ‘순수람’이라는 브랜드로 쇼핑몰을 만들었다. 이 쇼핑몰을 확대해 농민들의 잉여농산물을 대신 제조하고 팔아주는 역할을 할 계획이다. ‘순수람’이란 상표로 새싹차, 우엉차, 잼 등 진안 농특산물로 된 다양한 가공품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어린잎 채소는 비타민, 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해 고객들로부터 인기가 많다.
◆ 성공 요인은 끊임없는 노력과 새로운 시도 때문

그의 성공은 끊임없는 노력과 새로운 시도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어린잎 채소와 카레를 접목시킨 메뉴 개발에 성공한 것은 그 사례다. 생산성 향상에 따른 가격 경쟁력 확보, 다양한 납품처 발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성공 비결로 꼽힌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 보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역사회에 보람된 일을 하고, 6차 산업을 통해 새로운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천 대표는 “다양한 가공식품 개발과 농가 레스토랑을 확대해 해외까지 폭을 넓히겠다”며 “카레팩토리 가맹점을 크게 늘려 지역 농산물 소비와 베이비부머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천 대표는 카레팩토리를 단순히 카레를 판매하는 공간이 아닌 농업인과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는 창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식량이 무기화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린잎 채소를 우리만의 독보적인 농산물로 키워 세계에 브랜드화 시키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천 대표는 “성공은커녕 아직도 농사를 배우고 있다”며 “농사가 참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