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노비가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노비 시인이 5~6명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조선 정조 때 활약했던 노비 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정씨 나무꾼’이라는 뜻)가 있는데 그가 남긴 한시 ‘초부유고(樵夫遺稿)’에는 약 90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정초부의 시는 정약용의 ‘다산시령(茶山詩零)’에서도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翰墨餘生老採樵(한묵여생노채초)

시인의 여생은 늙은 나무꾼일 뿐

滿肩秋色動蕭蕭(만견추색동소소)

어깨에 쏟아지는 가을빛은 쓸쓸하기만 하고

東風吹送長安路(동풍취송장안로)

동풍이 시내 큰길로 나를 밀어 보내니

曉踏靑門第二橋(효답청문제이교)

새벽에 동대문 제이교를 걸어가네“

— 노초부(老樵夫)

 

정초부는 조선후기 양반인 여춘영의 노비였다. 나이가 스무살 정도 더 많은 정초부가 76세에 사망하였을 때, 여춘영은 두 아들을 데리고 정초부의 무덤을 찾아가서 위로하였고 정초부를 기리며 훗날 12수의 시를 남겼다. “어릴 때는 스승, 장성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직 나의 초부뿐(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이라고 여춘영은 정초부를 추념한 것이었다. 단원 김홍도의 도강도(도선도)라는 풍경화에도 정초부의 시가 쓰여 있다.

정초부는 풀을 베고 나무를 하고 노비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정초부는 총명하고 성실한 까닭에 주인에게 사랑을 받았고, 주인은 노비 정초부에게 학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정초부의 탁월한 시적 감성에 감동한 사대부들이 양근현(지금의 경기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을 방문하여 정초부를 만나곤 했다고 한다.

18세기 조선에서 한시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정초부! 비록 그는 노비였지만 자신의 총명함과 성실함을 다했고, 여춘영의 가문에서는 이러한 정초부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시대는 인재를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는 사람이 만들어간다. 정초부가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여춘영이라는 좋은 행복 코디네이터 가문을 만났기 때문이다. 오늘 대한민국에는 힘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정초부 같은 사람을 세워주는 여춘영이 많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행복 코디네이터라고 부른다. 이제는 당신이 여춘영이 될 기회이다.

한남대학교에서 2023년 3월 3일 춘계세미나를 마친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들

 

<글> 김용진 교수, 전)한남대학교 철학과 강의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행코교수단 단장, 한국행복학회 학회장,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뉴스포털1'과 '한국공보뉴스'의 칼럼니스트로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부설연구소인 한국행복학회를 통해 투 트랙(대학교에 행복교과목 또는 행복관련학과 개설 등을 지원하다가 행복대학교를 설립하는 것, 행복서포터즈 운동과 연계된 마을리더 행복멘토 직무교육 의무화 입법 추진)을 차근차근 행코 책임교수들과 진행해 가는 중에 있음.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