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편

첫사랑에서 여자는 첫사랑의 남자를 사랑하지만

두 번째 사랑으로부터는 연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 라 로슈프코

‘첫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누구나 설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공통적인 분모이다. 나 또한 ‘첫사랑’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 싱그럽고 상큼한 맛이 떠오르는 ‘청포도’가 항상 생각난다. 청포도는 7~8월이 제철이며 구연산과 유기산이 풍부하여 피로 회복에 아주 좋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첫사랑’은 단어 그대로 해석해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성을 처음 대하는 사랑이기에 누구나 서툴다.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표현 방법을 안다면 그 사람은 전생 경험을 하고 다시 환생하였다고 인정해 주고 싶다. 물론 아직까지 환생하였다는 사람을 만나본 경험도 없다. ‘사랑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랑은 첫사랑이다.’라고 우주 CEO 이대성은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사랑의 표본이고, 두 번째는 그 사랑을 생각하면 삶에 활력소와 추억을 줄 수 있고, 세 번째는 자신만의 감추고 싶은 아름다운 보물이기 때문이기에 혼자 가슴 깊이 고이 간직하라고 권하고 싶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 브뤼에르는 “인간이 단 한 번의 참사랑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그 뒤에 찾아오는 사랑은 이보다는 덜 강렬한 것이다.”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첫사랑’이란 제목의 시 중에 애틋한 내용이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시의 일부분을 살펴본다.

나를 생각하면 꽁꽁 언 네 마음에 싹이 돋는다 했지

한 술 더 떠, 나는 꽃까지 피었다 했어(중략)

- 윤보영

마알간 햇빛 속을 혼자 우는 새가 있다.(중략)

첫사랑 모올래 숨긴 단물 들던 그 가을!

- 유재영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중략)

호수에 가득 담기고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 김소월

밤나무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중략)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중략)

- 조병화

이제야 마음 다 비운 줄 알았더니(중략)

아직도 초록색 피 한 방울로 남아 있는 그대 이름

- 이외수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중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 고재종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중략)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 류시화

첫사랑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강력하게 말하던 새댁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나를 비롯한 남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5년 전, 한여름 폭염으로 이른 아침 지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구월동 농산물도매시장 한복판에서 배가 남산만 한 임산부가 어린 딸을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화물차에서 떨어진 농산물이 담겨 있는 박스를 주워 다보탑처럼 탑을 3개나 쌓아 놓았다.

평소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내 성격으로 다가가서 한마디 말을 걸었다. “몸도 무거운데 힘들지 않으세요?” 하고 물어보면서 바닥에 떨어진 농산물 박스를 주워 갖다 놓기를 여러 번 했더니 그때서야 새댁이 마음의 문이 열렸는지 “아저씨! 날도 더운데 힘들게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홑몸도 아닌데 쉬운 것이 어디 있겠어요.”라며 본인의 사연이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지방의 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도시에 올라와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지금의 남편을 첫사랑으로 만났다. 말도 아주 잘하고 돈도 잘 써서 얼떨결에 결혼하고 보니 모아 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카드빚만 있는 번지르르한 남편의 겉모습에 홀딱 반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생활도 잠시 아이가 생기고 점점 생활은 어려워져서 긴 밤을 한숨으로 지새우며 배 속에 있는 새 생명을 원망하며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월세를 사는 부근에 구월동 농산물시장에서 자정부터 경매를 하는 소리가 들려 잠도 못 이루다 무작정 농산물도매시장에 나가 보았다. 물건을 신속히 하역하다 보니 농산물이 담겨진 박스가 바닥에 떨어져 그 떨어진 박스들을 주워 차에 올려 주었으나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화를 내며 쫓아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현실의 어려운 환경에 답이 없는 임산부는 욕을 먹으면서도 매일 밤 떨어진 박스를 주워 올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박스를 주워 주는 임산부의 모습이 안쓰러워 박스를 줍지 말고 가져가 반찬이라도 하라고 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밤새 열심히 떨어진 박스를 주워 모았다. 모인 양이 혼자 먹기는 너무 많아 망설이고 있는데, 소매를 하시는 분이 오시더니 자신에게 팔라고 하여

그때부터 농산물을 모아 팔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농산물을 주워 파시면 살림에 얼마나 도움이 되세요?”라고 묻자, “당연히 살림에 도움이 많이 되고, 아직까지 부식은 사 먹은 적이 없어요. 남편 월급은 다 저축하고 통장이 5개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 사는 방법과 돈 버는 방법이 있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인사하고 가려고 하자 시금치 한 박스를 주셨다. 나는 차마 그 박스를 받아 나올 수가 없어서 마음만 받겠다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7년이 지난가을 저녁, 직원들과 식사를 하러 구월동에 위치에 한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여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서로 놀랐다. 분명히 안면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손짓, 발짓을 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내가 먼저 희미한 기억을 찾아내었다. “사장님, 혹시 7년 전 한여름 아침에 구월동 농산물시장에서 저하고 만난 적 있으시죠?”라고 묻자 “맞아요!”라고 하시며 반가워하셨다. 그 새댁은 지금의 사장님이시다. 그때 누구에게 말할 사람도 없이 외롭게 살았는데, 그때 선생님하고 두 시간 대화 후 막힌 속이 뻥 뚫린 것같이 편해져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사장님이 “주인이세요?”라고 묻자 “건물주이지만 은행 빚이에요.”라고 하시기에 “그래도 대출도 능력입니다.”라고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나오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

강유정 작가의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중에는 추억으로 완성되는 실패한 사랑, 첫사랑의 전설과 신화, 영화는 ‘뒤돌아보지 말라’라는 격언을 종종 제시하곤 한다.

‘소돔과 고모라’도 그렇고, ‘올드보이’도 그렇다. 여기서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지 물리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것일까?

그는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고 또 되뇌지만 결국 출구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고 만다. 이에 아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뒤돌아보기 때문에 추억은 완전해진다. ‘뒤돌아보기’ 사랑과 인생에서 그것은 독일까, 약일까?

평생의 선물이 되어 되돌아온 과거, 하얀 눈과 입김이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되는 작품, 〈러브레터〉는 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치 서리 낀 유리창 너머의 마을처럼 고즈넉하게 해석된 것이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는 나의 생각이다.

첫사랑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련한 추억이다. 수지란 스타를 만들어 낸 첫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총 411만이라는 관객을 돌파하면서 역대 멜로영화 중 신기록을 수립했다. 〈건축학개론〉은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모두의 첫사랑을 기억에서 꺼내어 다시 돌아보게

했던 가슴 뭉클했던 영화이다. 현실에서 우리들은 첫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던 첫사랑에 대한 공통점을 살펴보면 온라인 소개팅 서비스 이음은 20~30대 미혼 남녀 1,020명을 대상으로 ‘첫사랑’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첫사랑과 다시 재회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전체 설문 참여자의 70%인 714명이 “재회하지 않고, 그냥 기억 속에 묻어 두고 싶다.”라고 답했다.

10여 년 만에 첫사랑과 재회한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대답은 30%에 불과했다. 남녀 모두에게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기억임은 분명했다. ‘첫사랑의 이름과 모습을 얼마만큼이나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남성 78%와 여성의 90%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남녀 모두 첫사랑 시기는 대학교 때가 가장 많았다. ‘첫사랑 시기는 언제였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남성 설문 참여자 33%가 ‘대학교 때’를 가장 많이 꼽았고, 뒤를 이어 고등학교 때(30%), 중학교 때(26%), 초등학교 때(11%)순으로 답했다. 여성은 40%가 ‘대학교 때’를 선택했으며, 초등학교 때(30%), 중학교 때(15%), 고등학교 때(15%)가 뒤를 이었다.

‘첫사랑 상대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는 영화에서처럼 남성(59%)과 여성(40%) 모두 ‘학교, 학원 친구’라 대답했다. 남성은 학교 선후배(26%), 여성은 동네 친구(23%)가 뒤를 이었다. “첫사랑과의 연애 진도는 어디까지였나?”라는 질문에는 설문 참여자의 과반수인 50%가 ‘손잡

기’라 답했고, 뒤를 이어 ‘키스(25%), 가벼운 입맞춤(18%), 첫 경험(8%)’이었다.

‘내가 정의하는 첫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싱글 남녀들의 41%가 ‘순수함’이라 가장 많이 답했다. 다음으로 설렘(30%), 미숙함(19%), 열정(7%), 아픔(4%)이라는 대답이 뒤를 이었다. 그러면 당신의 첫사랑, 어떤 모습인가요? 그때를 떠올리며 다음 물음에 대하여 마음에 적어 보시는 것도 어떠할지 묻고 싶다.

① 내(우리)가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이미지는?

② 첫사랑을 다시 만났을 때, 생각의 변화

③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아내는 신랑이 첫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서로 묻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가끔은 궁금하지만 나도 첫사랑이 있었는지 짝사랑이었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나의 아내를 20대 초반에 만났으니 내가 첫사랑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나의 아내는 장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무더위엔 체력이 떨어졌다고 “우리 장어 먹으러 갈까요?”라고 말하고, 한겨울 날씨에는 체력 보충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장어 먹고 체력 보강합시다.”라고 외치며 봄가을엔 날씨가 좋다고 바람도 쐴 겸 지인들을 불러서 강화도에 장어구이 집에 가자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다가 장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장어마을에 가서 장어를 시켜 살아 있는 장어를 숯불석쇠판 위에 올려놓자 뜨거운 불길에 장어가 꼬리를 흔드는데(아니, 뒤틀고 있는데), 아내 왈 “장어 꼬리가 우리를 보고 손짓하네.”라고 말하기에 내 아내이지만 과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을까?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시적인 감성이 풍부한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전생에 조상들이 장어와 무슨 원한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요즘엔 장어를 노래 부르진 않지만 옛날엔 어찌나 좋아하던지. 우리 아내에게 비싼 장어를 사 주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어뿐만이 아니라 영양탕도 좋아해서 초 · 중 · 말복 전후에는 영양탕을 먹어야 뒷말이 없다. 올해에도 역시나 빠지지 않고 갔다 왔고, 바쁘면 포장을 해서 식구들에게 먹인다. 나는 아내가 주는 음식은 맛을 떠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다. 이것이 아내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라 생각한다.

첫사랑이란! 연애 경험이 없어 막상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초보 인생의 삶, 너무나도 서툰 화력 조절로 혼자 속을 새까맣게 태우다가 아픈 상처만 명예롭게 남기고 떠나는 첫사랑! 그러나 서로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아름다운 마음으로 추억하고 또 다른 사람의 추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했던 영국의 조지 고든 바이런은 “남자의 사랑은 그 인생의 일부이고, 여자의 사랑은 그 인생의 전부이다.”라고 말했듯이 남지와 여자의 첫사랑에 대한 생각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서로의 아름다운 선물로 포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사랑은 추억으로 남겨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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