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교차로에서

= “지하철 타고 유성으로 장 구경 갔다 남편과 이천 원짜리 잔치국수를 사 먹고 시장을 돌다가 빗방울 들이치는 장바닥에서 두툼하고 바삭한 녹두전 한 장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딱히 살 것도 없어 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려는데 시장 끄트머리에 산나물 한 무더기 풀어놓고 끄덕끄덕 졸고 있는 할머니 주인 못 찾아 시들해진 나물이 걸음을 붙잡는다 할머니 이거 몽땅 얼마예요

그냥 만 원에 다 가져가유 내가 산에 가서 뜯은 거니께 검정 비닐봉지에 넣어주는 할머니 손톱이 까맣게 물들었다 묵묵히 장바구니 들고 따라오던 남편 선뜻 이만 원을 꺼내 드린다

어르신 저기서 국수 한 그릇 들고 가세요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만 원의 따뜻함에 꽃샘바람이 차지 않다“ =

명불허전 작가이자 여장부인 문학박사 노금선 시인이 회심의 역작 [기억 어디쯤 심어 놓은 나무](도서출판 상상인)’를 펴냈다. 위 시는 이 책의 P.72~73에 등장하는 <만 원의 행복>이다.

저자 부부의 아름다운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시대를 맞아 서민들의 삶이 더욱 힘겹다. 만 원 한 장으로는 장보기에도 터무니없다.

하지만 <만 원의 행복> 시처럼 만 원을 어찌 쓰느냐에 따라 그 돈을 받는 사람은 어쩌면 화수분의 행복까지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 더욱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제목에서도 드러났듯 <기억 어디쯤 심어 놓은 나무>이다.

= ”막다른 절정에서 슬픔들이 열렸다 / 요양원 곳곳에는 그림자 뒤척이는 소리 / 나뭇잎 떨리는 소리 / 기억의 낱장이 넘겨지는 소리(후략)“ =

노금선 저자는 노인요양시설인 <실버랜드> 원장이다. 평소 자애심이 화풍난양(和風暖陽)이어서 따르는 사람이 마치 옛날 삼천 식객(食客)을 거느렸다는 대물(大物) 맹상군과 비교된다.

아무튼 그렇다면 나의 기억 어디쯤에 ‘심어 놓은 나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하릴없이 세월만 축내고 나이만 먹었다는 느낌이다. 예정했던 다섯 번째 저서의 출간은 돌발 변수가 발생하여 그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여 애먼 홧술만 마시는 터다. 그제도 유성에서 지인과 폭음을 했다. 그러나 홧술은 몸만 망친다. 가까스로 심기일전으로 마음을 무장하고 다시금 글을 고치고 있다.

상식이겠지만 시는 아무나 쓸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노금선 시인은 꼭꼭 숨어 머리카락조차 보여주지 않는 시를 찾아 골몰하고 연구한다. 아울러 흩어진 뼈를 맞추며 일어서듯 언어를 치열하게 발굴하여 이를 고운 시로 승화시켰다.

수시로 지워지고 태어나는 낱말들, 버려지고 찢긴 문장들, 문득 “찾아온 말”과 밤새 “찾아가는 말”, 쏟아지거나 말라버린 생각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는 문학은 우리의 태도와 의식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

노금선 시인은 우리네 일상의 삶에서 ‘시의 깊이’라는 우물물을 발견한다. 바쁜 일상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아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내며 대상을 인식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2002년 개원하여 지금까지 대전에서 <실버랜드 요양원>을 운영하는 시인은 널찍한 야외와 하늘이 보이는 실내 정원이 갖춰진 전원 속에서 병든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모시며 살아간다.

기자 역시 여기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요양원답게(?) 저자가 정성을 다하고 있는 <실버랜드 요양원>은 어쩌면 세상에서 소외된 치매 노인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가요처럼 ‘나도 한 때는 잘 나갔다’던 시절이 엄존했다. 저자는 오늘도 그들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교차로(交叉路)에서 이타심(利他心)과 자비(慈悲)까지 보태 정성을 다하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