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떡 나눔 봉사 계속하겠다”

진수만 대표는 대전시 서구 복수남로 36(복수동 606)에서 [동방떡집(042-587-5050)]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평소 불우하고 어려운 이웃과 주변에 그날 만든 떡을 나눔 봉사하는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도를 닦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성을 다 바쳐 맛있는 떡을 만든다고 했다. 진수만 대표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만드는 떡의 종류는 무려 25가지나 된다. 떡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기장떡, 흑임자 인절미, 모찌, 떡볶이 떡, 콩 인절미, 절편, 콩 송편, 꿀떡, 영양 떡, 답례 떡, 이바지 떡, 떡 케이크, 팥시루 떡, 쑥개떡 등이다. 여기서 만인의 호감도 1위를 차지하는 건 아마도 ‘꿀떡’이 아닐까 싶다.

‘꿀떡’은 분한 마음을 겨우 삭이는 모양의 의미도 있지만, 음식물 따위를 목구멍으로 한꺼번에 삼키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에 무게가 더 실린다.

누구에게나 친근한 먹거리로 으뜸인 떡은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거나 기름으로 지져서 만든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시루떡. 인절미. 송편. 주악. 경단 등이 모두 이에 속하며, 떡을 일컫는 한자어로는 고(餻), 이(餌), 자(瓷), 편(片, imagefont), 병이(餠餌), 투(偸), 탁(飥)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병(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떡을 먹었을까? 우리나라의 떡은 삼국(三國 : 고구려, 신라, 백제)이 정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다.

조선시대의 떡을 기록한 문헌으로는 도문대작(屠門大爵))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다양한 조리서가 발간되어 떡과 함께 음식조리기 기술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떡은 궁중(宮中)과 반가(班家)를 중심으로 더욱 사치스럽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음식 관련 조리서에 등장하는 떡의 종류만 해도 무려 198가지에 이른다. 또한 떡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의 가지 수도 95가지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삼 떡을 만드는 사람의 지극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한데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떡도 시련을 겪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성, 토착적 성격을 간직해 오던 우리나라의 떡은 한일합병과 이후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급격한 사회변화와 함께 물밀듯이 밀려들어 온 서양의 빵에 의해 밀려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문화는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어 사뭇 자랑스럽다. 또한 일반적으로 떡은 빵보다 든든하다. 밀가루가 아니라 우리가 만날 먹는 곡식이 주재료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잔치가 있을 때도 우리는 항상 떡을 선호했다.

기자의 경우도 딸과 아들이 결혼할 때 떡을 만들어 넉넉하게 돌렸다. 이제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 세계 10위의 선진국이라는 말을 쉬이 사용한다. 그러나 아직도 빈곤과 심지어 기아에까지 허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잊을 만하면 빈곤에서 기인한 극단적 선택이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있다. 진수만 대표는 남는 떡을 사회복지법인 한빛재가노인복지센터 등 주변에 나누고 봉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주변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

진수만 대표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 바쁜 와중에도 촌음을 아껴 매주 대학원에 나가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주병야독’(晝餠夜讀)의 끈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일이 잘될 땐 넘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는 속담이 돋보인다.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잘된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떡 나눔 봉사를 계속하겠다”는 진수만 대표에게서 그 마음의 성정이 넉넉한 떡함지 이상과 함께 마치 사계절 중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봄을 의미하는 화란춘성(花爛春盛)으로 보여 더욱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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