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비 부재 유감

-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정성만 있다면 진수성찬 못잖다
-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정성만 있다면 진수성찬 못잖다

일요일이었던 어제도 취재를 나갔다. 취재 중간에 모르는 전화가 왔다. 당연히 패싱(passing)했다. 상식이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모르는 전화, 그래서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에게서 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

더군다나 최근 친구가 거액의 보이스피싱을 당해 실의에 빠져있는 터다. 잠시 후 같은 전화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 ‘전화를 안 받으시기에 문자 드립니다. 저는 홍 선생님의 저서를 읽고 감동을 받아 통화하고자 한 00에 사는 독자입니다.’ - 순간, 참 센스 있는 분이라는 생각에 즉시 전화했다.

그리곤 자주 원활한 소통과 더불어 이왕이면 만나서 대포까지 한 잔하기로 약속했다. 이처럼 저자와 독자의 관계로 만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물며 기자와 인터뷰이(interviewee)로 조우하게 되는 경우는 그 몇십 배나 된다.

취재 중간에 또 전화가 왔다. 절친한 지인이었다. “내일 시상식이 있다는데, 가서 축하해 주려고...”라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 나름 의미 있는 상을 받는다.

그동안 얼추 봉사한다는 개념으로 참 많은 사람을 취재했다. 덕분에 커다란 상을 받은 분도 많다. 취재비는커녕 냉수 한 잔 안 얻어먹으며 보도해준 덕분이다. 하지만 내적인 고민은 적지 않다.

나처럼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는 자유 기고가인 까닭에 취재비(取材費)와 원고료를 받아야 비로소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 가장 곤혹스러운 게 취재비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애초 취재비를 원하며, 그에 맞췄다면 오늘날 이처럼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상식이겠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부분 습관이 그 기조를 이룬다. 처음부터 취재비를 받는 조건의 습관으로 출발했다면 지금처럼 경제난에 쫓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시작이 어긋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늘 저녁의 시상식처럼 결국엔 변색되지 않은 우산지목(牛山之木)의 선과(善果)로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우산지목은 ‘인간 본래의 선함’을 비유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고 우산의 나무처럼 아름답다. 그런데 이기심과 탐심, 권력욕이란 도끼로 연일 본성을 찍어대니 어찌 선함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의 사람을 만나고 취재한다. 기사로 보도되면 카톡 등으로 포스팅(posting)까지 서비스한다. 이 부분에서도 인터뷰이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를 웃기고 울린다.

고맙다며 밥 한 끼라도 먹자는 사람은 정말 ‘우산지목’의 참 감사한 분이다. 다음으로는 묵묵부답(黙黙不答) 형이다. 취재를 했으니 보도 역시 당연하다는 논지에서의 발전일 것이다.

끝으론 취재를 빌미(?)로 툭하면 연락을 하여 또 다른 건(件)의 취재를 요청하는 경우이다. 취재비가 한 푼도 안 들어가는 기자니까 나를 아주 만만히 보는 거다.

이런 경우 고사성어 <우산지목>에 등장하는 주인공 맹자의 탄식처럼 나 또한 마음이 몹시 헛헛해진다. 맹자는 “사람은 자신이 기르던 가축이 집을 나가면 온 집안이 다 찾아 나서지만 정작 양심이 마음을 떠나면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만날 땅만 파먹고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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