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바른소리 하는 사람이 갈수록 드물어 지고 있어”

노정(魯亭) 윤두식 선생
노정(魯亭) 윤두식 선생

“어머니의 따뜻함과 뛰어오르는 백마의 웅비”
“한문의 멋과 법도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칼날처럼 예리하여 섬뜩함”

우리나라 서예계를 대표하는 노정 윤두식 선생의 서예 작품에 대한 찬사는 다채롭고도 경탄에 가깝다.

5세에 글공부를 시작해 칠십 평생을 경서를 연구하고 글씨를 쓰며 살아왔다. 파평 윤씨의 연구모임 ‘백록학회’의 이사장을 맡아,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 전승의 책임도 지고 있다. 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을 때 그의 작업실 무위재(無爲齊)가 있는 충남 논산군 노성면으로 향했다. 일반인에게는 어렵게만 다가오는 서예의 세계를 묻고, 사라져 가는 고전 문화와 현대의 문화세태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 서예작품은 어떻게 감상해야 합니까?

서예작품 앞에 설 때마다 문외한들은 난감하다. 검은 것은 글이요 흰 것은 종이라는 두 가지 분간만 가능하다는 데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짧은 지식이라면 중학교 미술 시간에 익히 배워왔던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서예에 5체가 있다는 정도다. 선생께 서예를 물었다.

“중국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와 합하면 서예에는 6체가 있는데, 그 분야를 습득하지 않으면 그 경지를 몰라. 우리나라에 서예가 중 5체, 6체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잘 없어.”

더불어 서예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제대로 보는지도 물었다.

“자주 좋은 작품을 보며 안목을 키우라. 춘향이와 이 도령이 연애하려면 시전(시경(詩經))을 안 읽어보면 제대로 연애를 못한다 했다. 배워야 제대로 볼 수 있다 했지. 자기가 공자만큼 도가 높아야 공자를 알아보고 예수를 제대로 알려면 예수만큼 도가 높아야 그 경지를 알아본다. 공자의 수제자 안회 정도는 되어야 공자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겠나. 자기 수준을 높여야 한다.”

▶ “국전 공모전으로 입선‧특선해 초대작가가 되면 공부를 안 하는 세태 안타깝다”

제자 중 누군가가 글씨 빨리 배우는 방법 없냐고 선생께 물어 선생이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글씨 못 쓴다. 글씨라고 하는 것은 속성반도 없고 질러가는 길도 따로 없지.”

그는 지금 서예계의 돌아가는 세태에 겸연쩍어 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국전에서 옳은 이야기 하니 싫어하더라. 실력을 제일 중심에 놓고 심사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그 기본이 벗어나는 모습이 보이면 안타깝다.”

서예계는 초대작가라는 제도가 있다. 국전을 열어 작가가 입선·특선을 해 졸업하면 국전 초대작가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해서 전시회를 열어준다. 제일 처음 작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되면 노력을 않는다며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초대작가가 되면 사실 그때부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입선은 작가가 되기 위한 등용문에 불과하다. 그런데 초대작가 되고는 공부를 안 한다. 우리나라 ‘서예계에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이 있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해야 하는데 장가가야지, 밥 먹고 살아야지, 애 낳아야지, 키워야지 현실이 이러니 공부할 시간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게 인정해주는 작가의 작품이 중국에 선보이면 실질적으로 인정 못 받기도 한다는 자조 섞인 반성도 있었다.

“나는 초야에 묻혀서 글씨만 써온 사람이라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 대가의 작품도 해외 경매시장에 나가면 국내에서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공모전 심사에서 자기 제자를 키우려는 욕심에 실력을 우선시하지 않고 공정함이 배제되면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는 서예계의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진심으로 걱정했다.

“율곡 선생이 왜 유명한가? 당시 사회 잘못된 것을 상소정치로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의 충심을 후손들도 인정하고 존경한다. 지금은 바른 소리하는 사람이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어 걱정이다.”

명재고택
명재고택

▶ 현대 문화 세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세계적으로 K-팝이 널리 인기를 끌자 이런 음악만을 치켜세워 주는 면이 많다. 스포츠와 섹스·스크린에만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쏠리고 있다. 조금 더 격조 높은 우리 것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몸짓과 태도로 공연하는 일부 대중음악으로 정신세계의 질을 낮추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러니 세상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세상이 힘들어진다. 우리 전통에 있던 고상한 문화를 개척해 갔으면 한다.”

선생은 이 사회가 더 아름다운 사회가 되고 더 진취적이며 고상한 품격이 어우러지려면 좋은 음악이나 예를 배워 인성을 다듬어야 한다는 요지로 의견을 피력했다. 유학자라 전통적 사상이 깊고 보수적인 편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나는 유학자이기도 하지만 성경도 읽고 불경을 좋아한다”고 했다.

▶ 정악이 격조 높은 우리 음악, 서양음악으로 치면 클래식… 체계적으로 계승돼야

예부터 선비라면 모름지기 육예(六藝) 즉,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갈고 닦아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우리 정악에 대한 사랑이 깊고 한때 국립국악원에서 대금을 배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사라져 가는 정악에 대해서 언급하며 아쉬워했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가곡이 없어졌어. 서도소리, 남도소리는 범부들이 하는 노래다. 정통 국악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고상하고 바르고 큰 음악 정악(正樂)이라는 게 있는데 점점 묻혀가고 있어. 일제 강점기 때 끊겨버렸는데 국립국악원에서 잘 계승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악이 격조 높은 우리의 음악이다. 서양음악으로 치면 클래식이다. 현재 제대로 맥을 이어가지 못한다.”

▶ 5세부터 증조부 무릎에서 천자문 공부 시작… 평생 글씨 연마, 미려한 6체로 경서 옮겨

충남 논산시 노성면 출신인 노정 선생은 지난 2019년 9월 네 번째 개인전을 한국미술관 전관에서 열었다. 세계 최초로 시경 전체 305수를 미려한 육체로 표현해 평단과 서예계에서 많은 감탄과 찬사를 받았다.

이후 중용, 도덕경을 5체로 쓰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는데, 5세에 시작한 유학 공부와 글씨 연마도 어언 60여 년을 훌쩍 넘겨 이제 그의 나이도 고희를 지났다. 유학자이자 증조부 시춘 윤원중 선생의 무릎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해 지역과 서울의 유수한 스승께 사사받기도 했다. 좋은 글씨는 심오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며 작가의 인간상을 정직하게 드러낸다고 한다. 옛 선현들은 좋은 글씨를 위해 3개의 벼루 밑바닥이 구멍이 날 만큼 글씨를 썼다는데 노정 선생 또한 새벽 3시면 기상해 하루도 멈춤 없이 매일 1,500백 자의 글씨를 쓰며 연마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는 1983년도에 국전에 입선하고 1992년도에 국전초대작가가 됐다. 여러 차례 국전 특선은 물론, 각종 전시에 입선과 특선, 초대작가전을 거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파평 윤씨 노종파의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찾은 고르바초프
파평 윤씨 노종파의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찾은 고르바초프

▶ 파평 윤씨의 연구모임인 백록학회 회장

30년 전부터 파평 윤씨의 연구모임인 백록학회를 만들었다. 현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인 윤기중 씨가 종회장을 할 때, 그는 간사를 맡아 회를 이끌었다. 지금 백록학회에는 충남대학교 윤석경 부총장, 한문과 주역을 공부한 남명진 교수, 충남대 법정대 김재호 교수를 주축으로 20~30명이 드나들며 연구모임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운영을 위해 후원자가 좀 생겼으면 한다고도 했다. 현재 백록학회 임원은 20명으로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지 4년이 됐다. 백록학회 명칭의 유래를 물었다.

“주자(朱子) 선생님의 서원 이름이 백록서원이었다. 논산군 노성면의 파평 윤씨 자제 교육기관 종학당에도 주자 선생의 서원 이름을 딴 백록당이 있다.”

선생은 논산군 노성면에서 16대로 살았는데, 젊은 날 국전에 도전하고자 서울에 진출했고 서울 강동구에 살면서 사사를 받았다. 선생은 지금도 강동구에도 서실을 가지고 있다.

▶ 본지 명칭이기도 한 ‘청풍(淸風)’이라는 글씨의 기백

노정 선생의 작품 전시장에서 반가운 글씨를 만났다. 바로 본지 명칭이기도 한 ‘청풍(淸風)’이라는 글씨인데, 전시장 입구에 큰 글씨로 전시돼 있었다. 청(淸)과 풍(風)이라는 두 글자가 마치 대적을 앞두고 그 기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듯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선생께 글의 사연을 물었다.

“이 글은 서울 위례서예인협회 회장 시절 ‘청풍, 맑은 바람 부채전’을 열게 되었는데, 현수막에 인쇄하려고 썼던 글이다. 당시 술을 먹고 있는데 간판집 사람이 와서 글씨를 써달라고 해서 취한 상태로 현장에서 바로 썼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행사장에 떡하니 걸려있었다. 알고 보니 간판집에서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놓은 글을, 누군가 찾아 펼치고 배접하고 글씨를 확대해 살려 전시해 놨던 것이었다.”

명작의 가치를 누군가 알아보고 보존하게 된 내막이 흥미로웠다.

▶ 작품화… 글자의 조화나 배치, 구도 보고 집자 시 6체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어떤 시는 금문으로 써야 맞고, 또 어떤 시는 행시로 써야 맞을 수 있다. 집자하는 과정에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배치에 따라 6체 중 어떤 체로 쓸 것인지 결정한다. 글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글자 간에 앞, 뒤로 연결되는 조화나 배치, 구도를 보고 육체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는데 ‘집자’하는 과정이다.

작가의 재량에 달려있는데 여러 글자의 모양새나 어울림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미적으로 좀 더 조화롭다. 작가의 안목에 따라 다양한 작품으로 변환된다.”

▶ “그냥 내가 좋아서 평생 글씨 쓰고 살았어.”

다섯 살부터 시작한 서예를 고희가 넘은 지금까지 평생 이어온 소감을 물었다.

“운명적인 것도 있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그냥 했다.”

기대했던 질문이었는데 너무 싱겁고 짧게 맺어버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주길 기대하는 필자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뭘 그리 말을 만들어 가려 해?”라며 말을 이어갔다.

“시청에서 계장을 하나, 과장을 하나, 국장을 하나… 무슨 차이가 있나? 남보다 직위 올라가는 게 그게 머가 그리 좋나. 꼭 국장을 해야 돼? 요새 사람들이 정신이 잘못되어 가지고. 그냥 임한 그 자리에서 소신껏 일하고 감사히 공무원 마치면 되지. 꼭 승진해서 올라가야 한다고 강박에 시달려. 글씨도 그렇지만 세상사 남 이기려고 그러지 말고, 내가 만족하면 돼. 나는 그냥 내가 좋아서 글씨를 쓰고 살았어.”

문득, 논어에서 공자님이 말씀하신 구절이 떠올랐다. 지지자(知之者), 호지자(好之者)는 락지자(樂之者)만 못하다고 널리 알려진 그 구절. 무엇이든 아는 자보다, 좋아하는 자보다 ‘즐기는 자가 갑’이라는 그 메시지를 이 대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경험했다. 평생을 오직 서예 한길만 걸어온 그의 삶은 분명 ‘즐김’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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