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의 힘

잘 구워진 한우
잘 구워진 한우

추석을 맞아 아들네가 집에 왔다. 추석 전 수술을 마친 아내는 여전히 죽으로 겨우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당연히 얼굴에서 미소까지 사라졌다.

하지만, 올해 네 살이 된 한창 귀염둥이 친손자까지 왔으니 오죽 기뻤을까! 아내가 되찾은 함박웃음은 오로지 친손자와 ‘가족의 힘’ 덕분이었다. 대전역에서 하차한 아들이 렌트(rent)한 승용차 덕분에 처가부터 방문했다.

적막강산의 장모님께서는 내 손자를 보시자 더 반기며 좋아하셨다. 이어선 엑스포시민공원을 찾았다. 가족 자전거를 대여하여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한밭수목원의 화룡점정인 분수와 팔각정까지 구경하자니 피곤했던지 손자가 하품을 연발했다.

아들이 예약했다는 열차표에 맞추자면 서둘러 저녁을 먹어야 했다. 소문난 한우 전문 식당에 들어섰다. 바로 곁에서 남녀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림책을 보는 손자를 가리키며 “아이가 참 귀엽네요”라는 아주머니(?)의 칭찬에 맞장구를 쳤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세 분께서는 초등학교 동창이신가요? 분위기까지 아주 좋습니다.” 단박 박장대소(拍掌大笑)가 터졌다. “호호호~” “우하하하~” 원인은 금세 밝혀졌다. 약간 연세가 더 있으신 분께서 말문을 이었다.

그런데 한우는 솔직히 너무 비싸다!
그런데 한우는 솔직히 너무 비싸다!

“나는 올해 아흔 나이고 얘는 내 딸, 앞에 있는 남자는 사위라오.” 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와~ 정말이세요! 평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셨길래 사위보다 젊어 보이세요?”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초등학교 동창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금 정중히 인사를 하시기에 나도 벌떡 일어나 답례로 예의를 갖췄다. “아흔 살 아주머니, 더 건강하세요.”

사람의 나이 90세를 일컬어 구순(九旬) 혹은 졸수(卒壽)라고 한다. 반면 ‘아주머니’는 남자가 같은 항렬의 형뻘이 되는 남자의 아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식당에서 졸지에 ‘아주머니’로 젊어진 구순의 그 할머니께서는 분명 기분이 아주 좋았으리라.

나는 평소 칭찬을 잘한다. 그런데 칭찬에도 법칙이 있다. 아이들에게 있어선 똑똑한 머리보다는 노력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게 효과적이다. 칭찬은 고래뿐 아니라 노인도 춤추게 한다.

상식이겠지만 노년기는 주변 인물과 자신감마저 사라지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이다. 따라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눌 적엔 겸손과 채워짐이 필수다.

덤으로 나온 한우 육회
덤으로 나온 한우 육회

현역 시절의 무용담이나 자랑하고픈 가족 이야기, 추억의 음식이나 고향 이야기의 반추(反芻)도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고령자가 말씀하실 때는 고분고분 수긍해야지 부정해서는 큰 결례다.

또한 부모님과 어르신의 공통점은 자신이 과거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더 즐거워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들과의 대화에 있어선 순발력 있는 센스(sense)가 꼭 필요하다. 옆 좌석의 손님들이 가시고 난 뒤 아들이 술을 따라주기에 말문을 열었다.

“(최근 요직으로) 이동한 회사의 부서 분위기는 어떠니?” “아주 좋습니다.” “아빠의 잔소리 같겠지만 한마디만 하마.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익은 벼’가 되어야 한다.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인식과 이미지를 제고하길 바란다.”

“네, 그러려고 늘 마음을 채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보너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우리 아들은 최고야!”

역시(亦是)는 힘이 세다. 이는 ‘어떤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과 같게’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생각이 너와 마찬가지다”와 “너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어.”가 이에 해당한다.

식당에서 그림책 보는 손자
식당에서 그림책 보는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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