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치와 일미칠근

일터 인근의 논 역시 농부의 ‘일미칠근’이 필요하다
일터 인근의 논 역시 농부의 ‘일미칠근’이 필요하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무엇일까? 십인십색으로 모두 답변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고전 삼국지(三國志)를 꼽는 사람이 많다. 그다음으로는 초한지(楚漢誌)를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삼국지’에는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등장하지만 ‘초한지’에는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뤘던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나온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였던 항우는 그의 특유한 잔혹함과 함께 주변(참모)의 말을 듣지 않아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지면서 결국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항우가 죽으면서 천하의 대권을 손에 쥔 유방에게도 사연은 많았다. 그의 기라성 같은 휘하 인물 중에 옹치(雍齒)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유방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지만 유방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방이 거병하여 패현을 본거지로 삼았는데, 이듬해에는 옹치에게 패현 관할의 풍읍(豊邑)을 맡겼다. 하지만 옹치는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그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유방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초한 전쟁’이 지속되다 옹치는 유방에게 항복하였고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고조 6년(기원전 201년), 한 고조 유방은 공신(功臣)들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이때 특기할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자타공인의 충신이었던 최고 참모 장량(張良)은 공적 서열 62위인데 반해, 옹치는 그보다 다섯 단계 위인 57위의 공신으로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량은 항우와 유방이 만난 위기천만의 ‘홍문의 회’에서 유방의 위기를 구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아무튼 유방이 옹치를 장량보다 우대한 것은 나름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이었으리라. 유방이 옹치에게 그 같은 대접 외에도 봉읍(封邑 = 제후(諸侯)를 봉하여 땅을 내줌)으로 2천 5백 호를 내리는 걸 보고 제장(諸將)들은 비로소 안도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같은 사례에서 배신자로 죽었어야 마땅했을 자신을 오히려 살려주면서 기회를 다시 준 유방에게 옹치는 분명 일미칠근(一米七斤)의 자세로 공헌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가 만날 주식으로 먹는 쌀(밥)은 한문으로 쓰면 미(米)가 된다. 이를 파자(破字)하면 쌀이 밥상에 오르려면 농부의 88번의 손길과 정성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미칠근’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쌀알 하나를 만들려면 농부가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내용이므로. 일터 근방 논에 심은 벼가 성큼성큼 잘 자라고 있다. 그 벼를 보자니 문득 ‘일미칠근’ 생각이 떠올라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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