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던 전남도청 그곳의 이야기

박현정 선생님(문화체육관광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5.18과 전남도청

옛 전남도청은 1910년부터부터 현 위치에(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청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주변에는 금남로, 충장로, 중앙로가 있다.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는 각종 금융기관, 언론기관, 종교·문화시설이, 충장로는 각종 상업시설이 위치하여 광주·전남 지역민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해왔다. 이런 공간적·지리적 배경 때문에 옛 전남도청 일대와 인근의 금남로, 충장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자주 발생하였다.

1960년 4·19혁명과 그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전남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금남로를 중심으로 부당한 공권력과 국가폭력에 대항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던 전남도청 앞

5월 17일 자정을 기점으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생들과 계엄군의 충돌로 항쟁의 서막이 올랐고 곧바로 학생들은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를 향해 시위의 공간을 이동하였다.

광주시내에 등장한 7공수는 학생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구타를 자행했고 시위대 해산이라는 기존의 시위진압방식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망가는 시민을 끝까지 쫒아가 구타 후 연행하였다. 계엄군의 잔인성은 관찰자였던 광주시민의 분노를 자극했고 일부 대학생 중심의 시위는 곧이어 광주시민 전체로 확장되었다.

특히 5월 20일밤 대규모 조직적인 차량시위는 수세적 입장이었던 시위의 흐름을 바꾸었고, 투석전을 넘어 언론기관과 공공기관을 방화하고 관공서에 대한 점거시도를 계속하였다. 이날 자정 무렵 광주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최초의 발포로 수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계엄군은 이제 전남도청을 최후의 보루로 성난 시위대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5.21.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이루어지자 이제 시민들도 스스로 총과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이 되어 전남도청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결국 5.21. 오후 5시 무렵 전남도청 공무원들과 전남경찰국 소속 경찰,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비우기 시작했고 이날 저녁부터 시민군들은 공권력이 사라진 전남도청을 접수했다. 이들은 전남도청 1층 서무과를 시민군 상황실로 명명하고 스스로 자치권력이 되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맞서 일어선 시민들

그런데 공권력 대신 폭도가 점령한 광주는 무법천지가 아니었다. 시민군들은 빠르게 체계와 질서를 잡아갔다. 전남도청의 각 공간은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취사반, 시신관리반, 기동순찰대, 의료반, 무기회수반 등 그때그때 필요한 조직들로 채워졌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궂은 일을 찾아 묵묵히 일을 하였다. 특히 집단발포로 생겨난 수십명의 사망자, 외곽경계지에서 계속 생겨나는 총격 희생자들을 도청으로 이송하여 장례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5.22.부터 도청 앞 분수대 광장은 자연스럽게 시민성토장이 되었다. 고등학생, 아주머니, 노동자들이 연사가 되어 계엄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것인지 집단지성을 모았다. 5.26.까지 매일 도청 앞 광장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광주시민들은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을 참배하고 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하는 수습위원들은 협상결과를 직접 보고하였고 사과 없는 무기반납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준엄한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최후의 항쟁지 전남도청

5.26. 오후 계엄군의 최후통첩이 전해지자 마지막 궐기대회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항쟁기간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도 매일 광장에 나왔던 광주시민들도 결정을 해야 했다. 무기를 반납하고 도청을 비울 것인지 수거했던 총에 실탄을 채우고 계엄군과 맞설 것인지를.

광주시민은 ‘항전’을 선택했다. 새롭게 백여명이 도청사수대가 되기로 결정했다. 5.27. 새벽 기동타격대가 순찰하면서 실시간으로 계엄군의 이동사실을 전달하자 전남도청, YWCA, YMCA, 전일빌딩, 수협, 계림초교 등지에 시민군들이 속속 배치되었다.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시민군들이 가진 칼빈으로는 계엄군의 M16과 기관총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들은 자신의 옷 주머니에 이름과 주소 등을 적은 메모지를 구겨 넣었다. 만약 죽게 된다면 가족들이 자신의 시신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그때까지도 신원확인이 되지 않아 입관조차 못한 시신이 아직도 차가운 도청 마당에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전남도청은 바로 계엄군의 총칼에 더럽게 짓밟힐 수 없는 민주주의 정신이었고, 이유도 모른채 죽어야 했던 희생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으며, 동료를 두고 혼자서는 나올 수 없었던 의리였다.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 정신

새벽 박영순의 최후 방송이 광주시내에 울려퍼지자 잠 못 든 광주시민들은 숨 죽인채 흐느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한 시간 동안의 총격전 끝에 계엄군의 도청재진입작전은 싱겁게 종료되었다. 전남도청과 YWCA, YMCA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작전 종료 후 전남도청은 서둘러 물청소를 하고 핏자국을 지워냈지만 살아남은 시민군과 광주시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폭도라는 누명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훼손된 전남도청과 원형복원의 과제

2004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 예정부지가 전남도청 부지 일원으로 선정되고 2005년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되었다.

2008년 문화전당 기공식 후 전남도청 별관 철거가 예정되자 도청 철거 반대 공동대책위가 결성되었다. 수차례 항의와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도청 별관 24m와 건물 간 연결통로가 철거되었다.

2013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민주평화교류원이 된 옛 전남도청 리모델링 및 전시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전남도경 및 도경찰국 민원실 내부 층간 철거후 전시물이 구축되고 시민군 상황실로 사용된 서무과도 크게 변형되자 오월단체 등은 전남도청 원형복원을 요구하며 다시 농성과 항의를 시작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광주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남도청의 원형복원을 약속하였고 2019년 문체부 산하에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이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진단은 최대한 원형복원을 위한 시설 공사 및 사진·영상·구술 등 자료를 수합하여 전시구현안을 준비 중에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문체부 산한에 신설된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시설 원형 복원 및 자료 수집, 전시 등 준비

 이외에도 2020년부터 전남도청에 대한 탄흔조사를 실시하여 시민군 상황실로 사용된 본관 서무과와 경찰국 본관 후면에서 M16탄두 5기를 발굴하여 2021년 4월 대국민발표회를 한 바 있다. 그 후로도 조사범위를 확대, 정밀화하여 추가로 탄두를 발굴하고 탄흔을 식별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며 금년 5월 16일부터 ‘옛 전남도청 탄흔 특별전’을 기획중에 있다. 42년 동안 전남도청 건물 깊숙이 남아있던 총탄과 탄흔은 1980.5.27.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전남도청을 지켰던 시민군과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웠던 광주시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다시 각인시켜 주고 있다.

5.18 정신으로 만들어 가는 복지 세상

저항과 나눔의 정신, 자치와 연대로 대동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5.18의 정신은 시대를 넘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5월 정신이 현시대가 안고있는 다양한 문제 해결의 원천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양극화와 분열이 아닌 나눔과 화합으로 하나되는 사회!

누구나 예외없이 존중받고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세상!

차별과 혐오를 벗고 존중과 포용으로 나아가는 광주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80년 5월 그 때처럼, ‘인간중심, 복지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광주복지공감플러스가 가는 길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키워드
##518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