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서 일컫는 대종사(大宗師)란?

장주가 지은 <장자> 내편의 대종사(大宗師)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남백자규가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홀로 어디에서 도를 들었는가"하니 여우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부묵지자(副墨之子, 도를 전하는 도구 즉 문자)에게서 들었다. 부묵지자는 그것을 낙송지손(洛誦之孫, 끊임없이 암송)에게서 들었다. 낙송지손은 그것을 첨명(瞻明, 밝게 보는 것 시각작용)에게서 들었고, 첨명은 그것을 섭허(聶許, 도의 체득을 청각적으로 함)에게서 들었고, 섭허는 그것을 수역(需役, 터득한 도를 행동화)에게서 들었고, 수역은 그것을 오구(於謳, 도를 즐겨 감탄하고 노래함)에게서 들었고, 오구는 그것을 현명(玄冥, 도의 깊고 고요한 경지)에게서 들었고, 현명은 그것을 참료(參廖, 아무런 작용이 없는 경지)에게서 들었고, 참료는 그것을 의시(疑始, 의문을 품는것이 시작)에게서 들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부묵지자(副墨之子) 외 8명은 철학적 개념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부묵지자는 글이 지식의 방편이며 도를 전하는 도구인 문자를 의미한다. 여우는 온갖 글을 읽어서 도에 관한 것을 들었다고 남백자규에게 말했다. 낙송지손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모든 글을 읽었다는 것이고 첨명은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밝게 보는 것이다. 섭허는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잘 알아듣는 것이고, 수역은 마음에 터득한 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오구는 아름다움을 찬미하여 노래하는 것이고, 현명은 도가 깊고 고요한 것이고, 참료는 도가 더더욱 고요함을 의인화 한 것이다. 이러한 참료를 만나면 드디어 의시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의시란 처음이 있는 듯하면서도 처음이 없음인데, 이는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만물제동(萬物諸同)의 도에 이러름을 말한다.

그러나 득도(得道)와 깨달음의 단계나 그 전수과정을 설명하자면 기존의 순서와는 반대로 해야 한다. 즉 의시를 맨 먼저 언급하고 부묵지자를 마지막으로 하는 역순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그 첫번째가 의시인데 보거나 느끼는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두번째로 참료로서 참(參)은 참여하다는 뜻이고, 료(寥)는 텅 비었다는 뜻으로 의심을 마음에 품으면 그것을 고요함 속에서 무엇인지를 고찰해서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다. 세번째가 현명인데 현(玄)과 명(冥)은 모두 깊고 어둡다는 뜻이기에 고요함 속에서 깊은 명상에 의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네번째는 어구로서 감탄하며 노래하는 것과 깊은 명상에 의해 드러난 것을 노래할 때의 음의 확정처럼 정위치를 찾는 과정이다. 다섯째가 수역인데 수(需)는 기다린다는 뜻이고 역(役)은 기른다는 뜻으로 이는 오구로 정착된 드러남을 이것 혹은 저것이냐를 비교하고 분석하여 힘들게 깨달아가는 인식의 작용단계이다. 여섯번째는 섭허로서 수역작용에 의해 확인된 것들을 종합 개념화하는 단계로 마음의 속삭임을 바로 알아듣는 것이다. 일곱번째로 첨명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 도를 깨닫는 것으로 이뤄놓은 개념이 다른 개념과 상충되는지 아닌지를 명백하게 잘 살펴보는 과정이다. 흔히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한다. 여덟번째는 낙송으로 첨명에 의해 확인하고 확정된 개념을 물 흐르듯 뇌리에 저장하고 암송하는 것으로 글로 배운 도를 암송하고 반복해서 얻는 말을 통해 도를 깨닫는 방법이다. 아홉번째가 부묵인데 그 낙송되는 인식이나 지각을 먹과 붓에 의해 글자로 표현하여 잃지 않도록 도를 전하는 문자이다.

<장자>라는 책에서는 누가 대종사(大宗師, 가장 큰 스승)라는 언급은 전혀 없다. 다만 참다운 지혜를 체득한 진인(眞人)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즉 진인을 두고 생사의 관문을 초월하고 생각과 언어로 체득하고 논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무심(無心) 혹은 근본자리라는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부류도 있다. 하지만 근원적이고 이면적으로 파고들다보면 도를 닦아 마음을 허심(虛心)으로 삼는 상태인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는 심제(心齊)를 이룬 자신으로 대종사로 삼으라는 것이 필자가 내리는 결론이다. 즉 나를 지도하는 가장 위대한 스승은 바로 자기자신으로서, 내가 바로 스스로의 스승이라고 본다. 또한 비춰질 때는 반사하여 보여주는 마음을 거울(鏡, 경)로 만들라는 것으로 대종사를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논어>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여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겠는가!

<활기 정신건강증진연구원장 철학박사 임주완>

<齊和 노장사상연구소장>

<活起 풍수원구원 대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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