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편 #4, 노자가 본 우주(왕필통행본 제 5장)

 

原文)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聞數窮, 不若守於中. (多言數窮 不如守中)

直譯)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천지도 어질지는 않아서 만물들을 꼴개로 여긴다.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성인도 어질지만은 않아 다스리는 백성들을 꼴개로 삼는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하늘과 땅 사이란 오히려 풀무 같은 것이 아니냐?

虛而不屈 動而愈出(허이불굴 동이유출)

비었어도 짜부라 들지 않고 움직이기만 하면 더욱 많이 나온다.

多聞數窮 不若守於中(다문삭궁 불약수어중)

많이 들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중심을 잡는 것만 못하다.

(혹은) 多言數窮 不如守中(다언삭궁 불여주중)

말을 많이 하면 자주 막히게 되니 중심에 있는 것이 더 낫다.

意譯)

하늘도 땅도 어질지는 않아서 세상의 만물들을 꼴개로 여길 뿐이다.

가장 잘난 사람도 어질지만은 않아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을 꼴개로 삼는다.

천지사이 즉, 우주공간이란 오히려 풀무 같은 것이라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공간은 마치 풀무처럼, 그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짜부라 들지 않고 움직이기만 하면 거기서 바람이 더욱 많이 나오듯, 블랙홀에서 빅뱅현상에 의해 새로운 천체가 생겨난다.

많이 들을수록 더 자주 궁색해지는 것이니, 중심을 잡고 있는 것만 못하다.

혹은,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자주 막히게 되니 중심에 있는 것이 더 낫다.

解說)

이 5장은 노자(老子)가 직관의 사유(思惟)로 알아낸 우주를 묘사한 글이다.

노자의 저서(著書)는 크게는 왕필통행본(王弼通行本)과 죽간본(竹簡本), 금서본(帛書本)으로 나뉘어 전해 오는데 서로 간에 다소 차이가 난다.

위의 괄호 안에 든 문장이 금서본 문구이다.

우선 지구만을 보더라도 이 천지는 지진, 홍수, 소행성들과의 충돌, 화산들의 폭발, 갑작스런 지축의 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에 의해 생명체는 속절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우주는 인자하지 않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만물을 모두 꼴개 취급을 하는 것이며, 깨달은 사람이 왕이나 통치자가 되더라도 백성들의 어버이로 자처하면서도 전쟁이나 피치 못할 일이 생기면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전쟁에 내 몰거나 잘못이 있으면 형벌을 가해 꼴개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꼴개란, 옛날 풍습 중에서 지신제, 토신제, 산신제, 기우제, 하신제 등을 지낼 때 여건에 따라서 제상에 올릴 소, 양, 돼지 등이 없으면 풀을 소재로 하여 그 가축(家畜)형상으로 묶어 만들어 제상에 올렸다가 제사가 끝나면 그냥 버리거나 태워 버렸던 제물(祭物)을 일컫는다.

전쟁은 백성을 꼴개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러는 것이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이 우주(천지 세상)란 마치 풀무 같아서 풀무 자루를 밀어 속을 다 비워도 육면체의 틀인 풀무 그 자체는 찌그러들지도 않고, 밀고 당기기를 더 할수록 더 많은 바람이 생겨 밀려 나온다는 것이다. 바람을 일으켜 불을 지피자면 풀무는 밀고 당겨야 한다.

이처럼 우주 또한 그렇다고 본 것이다.

수명이 다한 행성이나 항성이 백색왜성이나 적색거성의 과정을 거쳐 종국에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그 공간은 텅빈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빅뱅현상에 의해 새로운 천체가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과학이 발견한 바로는, 우리의 우주 공간에도 밀도가 일정하지 않다.

어느 곳은 짙고 어느 곳은 비어있어 풀무를 밀고 당겼을 때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많이 해 봐야(이유를 따져들어 보지만) 더 모르는 궁색함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중도를 지킴이 옳다는 것이다.

餘說)

상자모양의 풀무는 속바람을 다 빼어도 찌그러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풀무 손잡이를 앞뒤로 당기는 움직임을 가하면 바람이 더욱 더 많이 나온다. (탁약은 풀무를 지칭함).

노자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우주(Universe) 또는 대우주(Cosmos)라는 용어의 개념이 따로 있지 않아 우주를 천지(天地)로 표현 했을 뿐이다.

그 우주는 어질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천둥과 벼락이 쳐대어 사람이 사는 집을 부수고 태우거나, 큰물이 일어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큰 규모에서 보면 은하(Galaxy)는 은하를 잡아먹기도 하고, 별들과 은하는 형체도 없이 오그라들어 블랙홀(Black-hole)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거기에는 인자(仁慈)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 가운데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한 지도자들은 과연 어떠한가?

의(義)를 위한 전쟁을 한다지만, 그런 전쟁은 그 전쟁으로 인해 죽고 다쳐야 하는 사람들 편에서 보면 인자하기는커녕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위 본문에 꼴개라고 한 것은, 옛날 가난한 백성들이 제사(祭祀)를 지낼 때 소, 돼지, 양을 잡아 상(床)에 올릴 수는 없으니까 대신에 풀(草)을 이용하여 그 가축의 형태로 만들어 대신 올렸던 것을 풀로 만든 개, 다시 말해 꼴개라 부른 것이다.

이 풀로 만든 동물형상은 그 제사가 끝나면 아무데나 쓰레기로 버려졌기에 쓸모없다는 표현으로 추구(芻狗)라고 한 것이다.

천지와 성인은 어질기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 이 자연의 큰 법칙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문장은 죽간본과 백서본이 서로 상이하지만 파고들면 그 뜻은 같다. 많이 들어도 자주 막히는 것이고, 말을 많이 해도 자주 막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중심을 꼭 붙들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경험으로도 다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한가?

* 요즈음의 고전 해설서를 보면 상당수가 해설자의 해설 또는 번역문을 먼저 써 놓고 원전(原典)의 문장은 뒤에 놓고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이는 그 자의 해석이 먼저이고 원저술자(元著述者)는 그 해설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한 마디로 고전(古典)을 거론할 예의조차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본다.

<활기 정신건강증진연구원장 철학박사 임주완>

<齊和 노장사상연구소장>

<活起 풍수원구원 대표>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필자는 교양문을 쓰지 않는 한, 원문(原文)을 앞에 두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뒤따르는 저자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 뜻을 탐구토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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