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 1395년에 창건된 조성왕조의 법궁(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
내부: 근정전(국보), 수정전(보물), 경희루(국보), 사정전(보물), 강녕전, 교태전,아미산 굴뚝(굴뚝보물), 동궁, 소주방, 자경전(보물)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향원전(보물), 건청궁, 집옥재, 태원전

경복궁의 광화문 입구(入口)
경복궁의 광화문 입구(入口)

(현설주 기자) 22.03.10 경복궁 현장탐방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성왕조의 법궁(法宮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고, 위로는 백악산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대로)가 있었고,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광화문을 통과하면 수문군들이 궁궐을 지키고 있다. 수문군 (守門軍):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여닫고 통행인을 검속하던 군인.
광화문을 통과하면 수문군들이 궁궐을 지키고 있다. 수문군 (守門軍): 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여닫고 통행인을 검속하던 군인.
흥례문을 지키는 수문군
"흥례문"을 지키는 '수문군'

광화문에 입장하면 이렇게 수문군들이 등장 하고, 수문군을 보고 궁궐을 더욱 더 빛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문 하나당 1명의 수문장 30명의 수문군 좌우 협문을 20명씩 총 70명이 궁궐을 지켰다고 한다. 정병과 갑사 대졸 등이 있다.

근정전의 모습이다. 근정전은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출범한다.
근정전의 모습이다. 근정전은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출범한다.

근정전국보  제223호 이며, 경복궁의 정전으로 '근정(勤政)이란 이름에는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다스리다'라는 뜻이 담겨있고,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이써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과거 및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고, 오늘날의 근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고종 4년(1867년)에 중건한 것이고, 사극 및 영화에 많이 출범하였다.

사정전 왕의 집무실 매일 출근 하여 업무를 보던 편전
사정전 왕의 집무실, 왕이 매일 출근 하여 업무를 보던 편전

사정전(보물 제1759호)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최고통치자인 왕이 공식전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고, 이곳에서는 신하가 매일 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인 상참을 비롯하여 경연(經筵), 윤대(輪對) 등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내부에는 옥좌 위에는 '운룡도'라는 그림이 있고 옥좌뒤에는 일월오봉도(병품)이 있다. 운룡도의 뜻은 구름은 신하를 , 용은 왕을 왕을 상징하며 왕과 신하가 서로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길 바라는 뜻을 담고 있고, 일월오봉도(일월곤륜도)는 다섯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이고, 통치자가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 영역에 조성된 정자이다.
향원정 경복궁 북쪽 후원 영역에 조성된 정자이다.

향원정은 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61호로 지정 되었고 '향원(香遠)' 뜻은 '향기(香)가 멀리(遠) 간다'로, 북송 시기 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라는 뜻이다. 봄, 가을에는 연못인 향원지,취향교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조선시대 겨울에는 한반도 최초의 스케이트 공간 이였다고 한다.  책 《조선과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1894년 겨울에 서양사람들이 얼어붙은 향원지 연못에서 스케이팅 시연회를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했는데 고종은 선교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엄청 웃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명성황후는 이성끼리 서로 손을 잡았다 놨다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으나 얼음판 위에 놓인 의자를 훌쩍 뛰어넘는 곡예를 부릴 때는 어린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조금더가 안쪽에는 건청궁이 있으며, 건청궁안에는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옥호루로 이루어졌으며 곤녕합은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살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집옥재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건청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집옥재(集玉齋)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건청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 28년(1891년)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集玉齋) 협길당 등을 이건한 것으로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되었다. 집옥재는 양 옆을 벽돌로 쌓아. 전통방식에 중국풍을 일부가미하여 만들 건물로 좌 우에는 팔우정과 협갈당이 하나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집옥재 내부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고 ,조선시대 관련한 도서 1000여 권과 왕실 자료 영인본 350여권, 그리고 한국문학 책 번역본 230여 권이 비치되어 있다.

신무문을 나가면 보이는 청와대
신무문을 나가면 보이는 청와대

경복궁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4년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고 당시 경복궁에는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각사들 ,왕과 왕비 및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휴식을 위한 정원등 500여 동의 건물들이 재조성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본래 모습을 복원 하고있습니다.

TV나 영화 및 가끔가다 한남 근처에가면 외관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내부에 들어 가본적은 없어서 근처에 간김에 꼭 들려보자하고 들려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혹여나 저처럼 내부에 가보지 않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 글을 작성 합니다."

수문군 영상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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