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편(宇宙篇) #1(왕필통행본 제 1장), 우주의 원리 

 

직역)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란 그 도가 옳은 것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는 이미 아니고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불려지는 이름이란 그 이름이 옳다고 불리면 늘 그러한 이름은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이름이 불려지기 전이 우주(천지)의 시초이고,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온갖 것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따라서, 바라는 것이 없이 바라보면 오묘함을 보게 되고,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바람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다.

此兩者 同出而異名(차양자 동출이이명)

이 두가지는 하나에서 같이 나왔지만 불리기는 다르게 한다.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

이 둘은 다 가물한 것이며, 가물하고 또 가물한 것이어서,

衆妙之門(중묘지문)

모든 오묘함의 열림이 된다.

 

의역)

무엇을 결론지은 문장인지 짐작이라도 되는가?

글자만의 직역을 읽고 무슨 말인지를 이해한다면, 귀신일지언정 사람일 수가 없다.

“道可道非常道”의 의미는 이 천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즉, 말로 표현되는 순간 달라져 버린다는 말이다.

이 문구에서 두 번째 나오는 道는 ‘말한다’는 뜻이다.

“名可名非常名” 역시 앞 문장과 같은 의미이지만, 이 두 번째의 名은 ‘이름붙이다’이고 여기에는 중대한 함의(含義)가 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다.

이 문구를 뒤집어 표현하면 “말이 없다면 태초도 없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란 말(로고스, 언어)로 표현됨으로서 그 존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의 논리로 보면 식(識, vijnana)이다.

색.수.상.행(色.受.想.行)이 아무리 있어봤자, 식(識)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말이 있음으로써, 그리고 이름이 있음으로서 하나님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 명(名) 역시 이름으로 하는 순간 달라져 버린다고 했다.

이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의 이 문구는 최소한의 의역(意譯)을 하더라도 道든 名이든 변화 즉 역(易, Change)하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道를 진리로 본다고 한다면 진리란 그 진리가 맞다고 하면 이미 그러한 진리는 아니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세의 10계명의 제1 계명에 대입(代入)해 보자.

그러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가 “내 앞에 두는 신은 항상 다른 신이다”로 바뀌게 된다.

이래서야 어찌 하나의 신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다음 구절의 이름이 무엇인가?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이름일진대, 이름에 대하여 그 이름이 맞다고 하는 순간에 이미 그 이름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특정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것으로 된다.

이어진 문장에서 그 이름을 해설하기를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고 정의를 규정해 버렸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천지우주의 시작이요, 이름이 있게 되면 모든 것을 낳는 어미가 된다고 했다.

즉, 존재란 있더라도 이름 붙이지 않으면, 변해버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이고, 이름을 지어 붙이면 우주만물의 생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름붙이기 즉 말이 없으면 천지(우주의 옛 표현)의 시작점일 수는 있어도 존재란 없는 것인데, 이름을 붙이자마자 이는 만물인 모든 것과 존재의 개념 현상 형상들 즉 식(識)의 대상이 되는 것들의 어미(母)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은 이름이 붙자마자 다른 이름을 낳는 어미가 된다.

이러한 도(道)라는 것과 이름이라는 것에 대하여 노자의 사고는 바로 무서운 진실의 경지를 파고 들어간다.

그 다음으로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해석해 보면, 『따라서 언제나 아무런 무얼 하고픈 마음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 우주는 그 오묘함을 보게 되지만, 늘 무엇을 밝혀 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것이 돌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의 생각의 깊이와 바로 깨닫는 지혜를 보고 본받아야 한다.

도(道)라는 것도 변하는 것이고, 이름이라는 것도 변하는 것이니까 그저 아무 생각없이 되어가는 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이 우주만물과 삼라만상은 참으로 오묘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몸뚱이는 같은 세포의 구조인데도 어느 것은 뇌이고, 또 어느 것은 항문이 된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구는 태양을 끊임없이 돌고 있는데 그 지구를 또 싸고도는 달은 지구를 돌면서 동시에 지구와 함께 태양을 돌고 있다.

태양이나 지구나 항성이든 행성이든 무게를 가지고 있고 회전을 하는데, 태양계든 그것이 모인 은하계든, 별들이 모인 곳이 있고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서로 밀려나거나 달라붙지도 않고 자신의 궤도를 무한히 돌고 있는 것이다.

우주와 은하계, 태양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오묘하게 생겨 있는 것을,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록 오묘한 것은 왜 그런 것인지 따져보고 싶은 의욕을 가지고 보면,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원자(atom)도 핵을 중심으로 전자는 쉼 없이 돌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쉼 없이 돌고만 있다.

전자현미경을 가지고 원자 이하의 단위인 쿼츠(quartz)를 본다면 거기도 핵이 있고, 핵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 또 있다.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우리 지구가 돌고 있듯이 말이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그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을 축으로 하여 또다시 돈다.

지구를 품고 있는 이 우주는 또 더 커다란 코스모스(cosmos)속에서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 돌고 있는 구조는 돌맹이나 공기가 모두 다르지 않다.

우주구성분의 4.9% 밖에 안 되는 물질은 모두가 같은 핵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하고픔을 가지고 보면 돌고 있는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도(道)라는 것과 명(名)이라는 것은 한 가지를 다르게 부른 것에 지나지 않듯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빛이 없는 검은 존재일 따름이다.

잘못 생각하면 물질은 빛이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빛은 또 다른 광자라는 물질일 따름이고, 물질 가운데서 가장 투과력(透過力)이 강하다고 하는 우리 눈으로는 볼 수도 없는 감마선 같은 우주로부터 끊임없이 날아오는 우주선(宇宙線)들은 모두 다 어두운(Dark) 것이다.

그 다음 노자의 말은 “此兩者同出而異名”이라고 했다.

이를 직역하면 『도와 이름 두 가지는 함께 한 군데서 나온 것인데 이름을 달리 부를 따름이다.』

여기서 두 가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시(始)와 모(母), 유명(有名)과 무명(無名), 유욕(有欲)과 무욕(無欲), 묘(妙)와 요(徼), 도(道)와 명(名)이 바로 그 두 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그 근원이 단 하나로 함께 나왔으나, 다르게 이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말은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이 두 가지들은 하나이며 한가지로 알 수 없는 가물 함이라는 것이고 가물 함 중에서도 또 가물 한 것일 뿐이며 모든 오묘한 것들을 찾아 들어갈 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이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제 6장에 조금 더 이해의 실마리를 보이고 있다.

노자는 제 1장에서부터 우주란 어떤 것이냐를 따져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단 60자의 글자로 우주를 한꺼번에 설명하고 정의를 내린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노자의 저서(著書)를 언급한다는 것은 마치 그의 81장을 읽고 이해한다는 말은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는 뿔을 보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편에서 노자의 道란 우주의 원리와 블랙홀이다.

우주란 끝이 없는 것이고 그 원리란 우리의 지능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함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그 우주 안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해설)

이 1장은 노자의 직관적 사상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면서 나머지 80장에 대한 결론까지도 포함하는 내용이다.

도(道)란 우주의 시초이고 물질과 현상, 개념, 시공간 등 우주의 구성체인 물질,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 총합(總合)의 어머니다.

그래서 이 도라고 하는 것은 늘 같은 것일 수가 없다.

어느 순간에는 블랙홀(Black-Hole)이지만 다음 순간은 빛이 없는 초기 우주, 그 다음 순간은 빛이 있는 우주와 만물이고, 어느 순간에는 다시 Black-Hole로 되돌아 가 있다.

단 한 순간도 같지 않고, 계속 변한다.

이러한 도(道)를 이름 지어 부르면 그 이름 또한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과 지성으로 파악할 때는 이름 지어 부르기 전은 우주의 시발점이고 이름 지어 부르면서부터는 온갖 것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道라는 것 즉 블랙홀을 무엇으로 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없이 바라보면 참으로 오묘한 것이지만, 이것이 빅뱅(Big-Bang)이라도 일으키겠지 하는 바람을 가지고 보면 Black-Hole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Black-Hole과 Big-Bang은 실은 하나일 뿐인데 나타나는 현상의 다름으로 그 이름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해가 불가능한 가물거리는 것이고 따지고 들수록 더 가물거려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이 열리는 문인 것이다.

혹여, 아득할 현(玄)을 블랙홀(Black Hole)로 해석하면 안 된다.

아득할 또는 검을 현(玄)은 암흑 물질(Dark Matter), 암흑 에너지(Dark Energy)의 Dark인 것이다.

노자는 Black Hole을 도(道)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우주는 Dark Matter 와 Dark Energy가 95.1%를 차지하고 있으며 물질은 겨우 4.9% 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위에서는 우주를 말했지만 원자(原子)로 보아도 그 결과는 같다고 본다.

원자를 분해하면 핵과 전자(Quark, 쿼크)인데 의욕을 가지지 않고 원자를 관찰하면 참으로 묘하기만 할 뿐이지만, 분석할 의욕을 가지고 보면 쿼크는 핵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위 해설에 우주가 아닌 원자를 대입하더라도 결론은 같아진다.

핵을 중심으로 도는 Quark와 전자들의 운동량과 움직임의 차이에 의해 만물은 다르게 형성되고 다른 이름의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를 부정할 방법이라도 있는가?

이 1장(章)을 양자론과 대비해 보시라!

그게 싫다면 최신의 천체물리학 이론과 대비를 해 보더라도 노자의 저서(著書) 1장은 우주의 원리를 논한 것이지, 인간의 도와 덕의 규범을 말한 것은 아닌 것이다.

 

여설)

이 1장이 노자의 저술(著述)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고 더 이상의 논의를 할 여지가 없는 내용이며 나머지 80장은 1장의 해석과 1장의 내용을 부연하여 사람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설명한 것들일 뿐이다.

따라서 1장을 노자의 직관적 사고로 이해하자면 노자와 같은 직관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말하자면 이성적인 체계를 배웠고 그러한 이성적 체계나 변증법적 사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단시간의 해설로는 온전하게 이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른 문장을 해석할 때마다 이 1장을 상기시키고, 그 직관적 정의(定義)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노자의 사상은 우리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사유의 체계를 바꾸어 줄 것으로 확신한다.

어떤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이미 일어나 있는 그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사고의 변환을 노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으로 믿는다.

이것을 직관(Intuition)이라고 하는 것이다.

 

* 노자의 문장은 “~~하기 때문에 ~~해서 ~~한 것이다”라는 해설식이 아니라 깊은 직관적 사색으로 도출한 결론만을 직설적으로 써 내렸다.

따라서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자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활기 정신건강증진 연구원장 철학박사 임주완>

<齊和 노장사상연구소장>

<활기 풍수원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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