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 이끈 ‘젊음의 방송’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은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한데 이어 동양방송과 동양TV를 설립하여 서울에 중앙 매스컴 센터를 출범시켰다. 이병철회장과 수요회 멤버였던 한국신문협회 상임부회장 전남일보 김남중사장은 이병철회장처럼 광주에 종합 매스컴센터를 짓겠다는 생각으로 전일빌딩 신관에 언제든지 라디오방송과 TV방송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하도록 했다.
그 시절 박정희대통령은 김남중사장을 친구처럼 불러 시국에 대한 의견을 듣고 술잔을 나누곤 하였는데 어느 날 김남중사장이 광주에도 종합 매스컴센터를 짓고 싶다고 말하자 박정희대통령은 체신부에 전남일보사에 방송국을 허가해 주도록 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라디오방송이 세 곳, 광주KBS와 광주MBC, 광주CBS가 있었고 TV는 KBS-TV와 호남TV(박정희대통령 대구사범동창인 최승효씨가 설립, 훗날 MBC-TV가 됨)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지역 TV는 뉴스 외에는 서울에서 녹화테이프를 열차로 보내 와 방송하던 시절이었고 TV 보급(흑백)이 극소수에 달해 호남TV는 적자에 허덕였다. 김남중사장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TV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우선 라디오 방송을 설립, 방송 명을 전남일보를 줄여 전일방송으로, 콜사인을 VOC(Voice of chunil)로 정하고 시험방송에 들어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방송은 중파 1220Khz로 전일방송의 시험 방송입니다. 새로운 감각, 새로운 내용으로 새롭게 메아리칠 또 하나의 다이얼이 광주에 탄생합니다. ‘새롭고 알찬 전일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희망찬 첫발을 내딛고 있는 전일방송은 1970년 11월 10일 체신부로부터 호출부호 HLAA, 주파수 1220Khz, 출력 20kw로 라디오 무선국의 가허가를 얻어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를 포함한 호남지방은 물론 경상남북도 일원을 비롯해서 멀리는 제주도까지 광범위한 청취권을 자랑하는 호남 최대의 라디오 방송으로 출범하게 됐습니다. 4월 24일 개국하는 VOC 전일방송은 연주소를 광주시 금남로 1가 1번지에 두고...... 」

TBC의 인기프로그램과
전남일보(광주일보)의 보도망으로 선풍

서울 TBC 동양방송의 각종 연예, 오락, 보도, 교양프로그램과 전남일보의 거대한 지역 뉴스 보도망,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각종 로컬 프로그램은 광주와 전남북지역에 선풍을 일으키며 VOC 전일방송은 개국 6개월 만에 공식 조사에서 청취율 54%라는 전대미문의 청취율을 기록하였다. VOC 전일방송은 ‘새롭고 알찬 전일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답게 지역에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선보여 지역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라디오 다이얼을 1220Khz 에 맞추면 봉두한씨가 진행한 2시 뉴스의 현장,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한 장수무대, 형사 콜롬보 역을 맡았던 성우 최응찬씨가 진행한 광복 20년, 성우 고은정씨가 맡았던 아차부인 재치부인, 구봉서의 핸들작전, 이미자의 가요 앨범, 7시 20분, 8시 20분, 9시 20분 연속극 등 서울에서 최고의 시청율을 자랑하는 TBC 동양방송의 주옥같은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지역프로그램인 운전사를 위한 가로수를 누비며, 주부들을 위한 홈스위트홈, 시사고발프로그램 시민의 소리, 시사 가십프로그램 라디오 쌍나팔, VOC대행진, 가요드라이브, 팝송다이알, 음악의 여로, 은하수의 메아리, 밤을 잊은 그대에게, 노래자랑 장기자랑, VOC장학퀴즈 등이 흘러 나왔다.

‘라디오 쌍나팔’‘밤을 잊은 그대에게’
‘VOC장학퀴즈’등 생생

또한 고교야구 열풍을 일으킨 VOC 야구중계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각종 고교야구 대회에 참가한 지역 고교팀의 모든 경기를 VOC 아나운서가 서울운동장에서 직접 중계 방송하여 호남에 야구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훗날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이 된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VOC 야구 해설위원으로 데뷔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야구상식을 전하는 김재익 아나운서의 야구중계는 중계방송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팝송다이알’과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인기 DJ이자 프로듀서인 이상옥이 만든 VOC 대학가요제는 제1회 우승곡 김만준의 “모모”가 전국에 “모모”열풍을 일으켜 가요톱텐 등에서 5주간 1등을 하여 당시 전국의 카페 이름도 모모, 양장점 이름도 모모, 세탁소 이름도 모모, 소주집 이름도 모모로 모모가 국민가요가 되기도 했다. 2회 때는 근래 5.18기념식 공식 지정곡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이 부른 ‘소나기’가, 3회 때는 하성관의 ‘빙빙빙’이 전국의 대학가와 가요계를 휩쓸어 지방 방송국의 대학가요제가 한국 가요계를 뒤흔드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국방송사에서는 처음으로 FM카를 뉴스현장에 투입하였고 ‘노래하는 FM카’란 프로그램으로 청취자가 직접 FM카에 올라 노래하고 사연을 전하는 파격적 방송을 실행한 VOC 전일방송은 한마디로 ‘젊음의 방송’이었다. 최경천 아나운서가 진행한 전일방송의 VOC장학퀴즈는 청소년들의 새로운 교육의 장으로 알려져 프로그램 스폰서였던 선경합섬이 서울 MBC-TV에 이 프로그램을 TV에서 하도록 주문하여 차인태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MBC장학퀴즈가 태동되었다. 새봄맞이 공개방송, 바닷가 임해방송, 단풍축제방송, 국악의 향연, 1220올스타쇼 등 매달 청취자와 함께하는 공개방송을 진행하여 움직이는 방송을 지향한 전일방송은 남진귀국쇼, 김추자쇼, 패티김쇼, 리틀엔젤스광주공연, 김자경오페라단초청 오페라춘희공연, 서울시향초청공연, 정경화,장명화 광주초청공연 등 서울에서만 진행되던 여러 공연과 연주회를 광주무대에 올려 예향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TV의 보급대수가 적어 라디오 전성시대였던 1970년대, 호남지역엔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VOC 전일방송이 지역민의 삶의 애환을 함께 하였다.

1980년12월 1일 0시 신군부에 의해 고별방송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이후 언론계는 언론통폐합에 따라 TBC, SBS, VOC, DBS는 KBS로 통합하고 CBS는 보도기능을 폐지하고 선교방송만 하도록 했다.
1980년 12월 1일 0시 “전일방송을 사랑하고 가꿔 주신 애청자 여러분, 그동안 입은 은혜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신의 가호가 언제까지나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를 끝으로 전파송신을 중단한 전일방송은 1971년 4월 24일 개국하여 3,507일 동안 호남 벌에 하루 22시간 전파를 보내 전라도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민간상업방송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지만 전두환 정부의 출범이라는 암울한 시대의 조류에 밀려 지구촌을 떠나고 말았다. 1980년 11월 1일 아침 VOC 전일방송 직원들은 KBS로 떠났다. 눈물을 흘리며 줄줄이 만딩고 되어.

이상옥< 전 전일방송 PD, 광주YMCA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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