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새벽 최후항전하다 전원 전사” 3층 편집국 유리창 등에 총탄 송송 뚫려

 
▲ 80년 5월 10일간의 항쟁이 끝난 뒤 전일빌딩 뒷편 곡면유리차에 촟탄의 흔적이 뚜렷히 남아 있어 그날의 치열한 참상을 알려준다.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신복진 사진부장 촬영

“전일빌딩은 건물이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대표적 상징인 금남로가 단순한 길이 아니고 역사이듯, 공식 이름자가 ‘전일회관’인 전일빌딩은 그 또한 저항의 역사를 머금는다. 빌딩의 역사는 크게 두 쪽으로 고랑을 낼 수 있다. 하나는 5·18 현장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음이며, 둘은 ‘호남 언론 1번지’라는 것이다.
5·18 최대 격전지인 금남로와 전일빌딩은 어떤 사이인가. 빌딩의 지번(地番)을 보면 금남로와 일가(一家)임을 알게 된다. 빌딩의 번지수가 ‘금남로 1가 1번지’이기 때문이다. 금남로가 빌딩의 번지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5·18도 그랬다. 공수부대(계엄군)가 외곽으로 퇴각한 5월 21일까지 연 4일 동안 옛 전남도청 앞 광장과 맞물린 빌딩 앞길에 주력 저지선을 구축해두고 ‘광주’를 걷어차고 후려치고 찌르고 쏘는 등 거대한 국가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빌딩 안에서도 5·18은 진행된다. 21일에는 빌딩에 배치된 공수부대가 빌딩 밖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어 27일 새벽 ‘광주’가 무너지던 날엔 빌딩 옥상이 주검의 공간으로 변한다. 시민군 40명 가량이 LMG(경기관총)와 함께 배치되어 최후의 항전에 나섰으나 그날 새벽 4시 40분 빌딩에 투입된 공수부대 11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5·18 최초의 단행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전일빌딩의 시민군들도 끝까지 항전하다 전원 전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빌딩의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당시 빌딩의 주인은 옛 전남일보사(현 광주일보사 전신)였고 편집국은 3층에 있었다. 빌딩 뒤쪽 맞은편엔 광주YWCA 건물이 있었으며 현관에 ‘대학생 집결소’라고 써 붙여두고 있었다. 그 11여단은 빌딩 옥상을 제압한 뒤 YWCA 안에 있던 시민군과 교전 끝에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체포했다. 전남일보 편집국 뒤쪽 유리창엔 그날의 상흔이 얼마간 숭숭 뚫려 있었다. 11여단 병력 가운데 일부가 편집국으로 뛰어들어 YWCA 진입조를 엄호 사격한 것으로 분석되는 수백 개의 총구멍을 보고 기겁하지 않은 기자가 없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언론은 그날부터 비상계엄령이 해제되는 81년 1월 24일까지 계엄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광주지역 검열관실은 전남도청 본관 2층에 있었고 505 보안대 요원 1명과 정훈 장교 4~5명이 검열 업무를 수행했다. 신군부의 야욕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드러나면서 검열의 강도는 높아갔다. 그와 함께 민주화의 열기 또한 거세졌다. 빌딩 3층의 전남일보 기자들은 까다로운 검열과 민주화의 파고 사이에서 신군부 쪽이 경계하는 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검열의 벽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80년 5월 15일에 이르러, 전남일보·전일방송 기자 62명은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결의대회를 갖고 결의 내용을 16일자 1면에 6단 상자기사로 게재했으나, 검열에서 반쯤 잘려나가 그 빈자리에 ‘전남일보 광고문의’등 돌출광고를 6개나 집어넣어야 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는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는데, 두 신문은 19일자(18일은 일요일이어서 신문이 쉬는 날이었음)와 20일자 신문만 찍어내고 윤전기를 멈췄다. 그 멈춤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알 길이 없다.
참극의 실상이 빠진 껍데기 신문을 접하면서 전남일보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21일자 신문을 ‘검열 받지 않고’ 만들기로 결의한다. 18·19·20일 상황을 ‘사실 그대로’ 담아내 시위 군중들에게 뿌리자는 것이었다. 조판까지 마쳤으나 윤전기는 돌지 못했다.

▲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통합되기 전날인 11월30일 전일빌딩 옥상에서 김종태 사장이 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기를 내리고 있다. <광주일보 40년사>
문화공보부의 지시에 따라 신문이 속간된 건 6월 2일이었다. 그날 전남일보 기자들은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광주시민들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라도 당국의 지시를 단 하루라도 거부해야 한다, 신군부 쪽 비위를 맞추는 신문 만들어 시민들한테 돌팔매질 당하느니 차라리 당국에 매 맞는 것이 낫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회사 쪽과 협상 끝에 2일자 신문만은 침묵하기로 합의 했으나 신문은 나오고 만다. 기관 쪽의 강도 높은 폐간 압박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몇 기자들이 공무국에 내려가 문선 중인 원고를 수거해 달아나는 등 강하게 저항했다.
5·18 때 전남일보 편집국 등 빌딩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많이도 몰려왔다. 빌딩이 시민군의 저항과 계엄군의 진압을 한눈에, 그것도 안전하게 볼 수 있는 위치와 높이였기 때문이다. 빌딩은 긴급피난처이기도 했다. 시민들 가운데 공수부대에 쫓겨 빌딩으로 몸을 숨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호남 언론사(史)로 잴 경우 빌딩은 큰 키를 갖고 있다. 지금의 광주일보 등이 금남로 1가 1번지와 빌딩에 제호를 달았던 시간은 ‘76년’에 이른다. 광주·전남언론인회가 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해 빌딩에 ‘아시아언론박물관’ 설립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런 소이에서다. 빌딩의 생사는 광주광역시가 쥐고 있다. “역사는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속삭임을 시는 듣고 있는가. 빌딩의 지킴은 곧 5·18의 지킴이다.

나의갑<전 전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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