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실하기 위해 전남도청 앞까지 줄지어 서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전일빌딩 앞을 지날 때면 생각나는 것이 전일도서관에 입실하기 위해 새벽부터 전남도청 앞쪽까지 늘어섰던 학생들이다. 매일 아침 8시께가 되면 좌석이 꽉 차서 문을 닫아야 했다. 어렵게 얻은 좌석이라 중간에 돌아가는 사람이 거의 없고 또 밤 10시가 지나서야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전남대와 조선대 도서관 말고는 독서실마저도 없던 때라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때문에 도서관직원들은 하루 14시간이상씩 근무하면서도 학생들의 향학 열기에 피곤할 틈도 없이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즐겁기만 했다. 특히 취직시험에 합격하거나 승진하여 인사차 도서관에 들른 사람들도 종종 있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소위 출세했다는 의사나 판검사도 여러 명 배출되었다.

전일도서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 공공도서관으로 1970년 4월 25일 전일빌딩 6층에 개관되었다. 연건평 5,000여평, 열람좌석 725석, 장서 50,000여권으로 당시로서는 최대를 자랑했다.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길지 걱정하던 시절이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도서관을 세울 엄두를 못했고 독서실 같은 것도 별로 없었다. 더욱이 당시 대부분의 가정집에는 공부방이라는 것이 따로 없고 한방에서 여러 형제가 함께 지내기 일쑤였다.
이 같은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고(故) 김남중 회장 (당시 全南日報·全日放送會長)이 사재(私財)를 들여 도서관을 세웠는데 중·고등학생들은 물론 취직 또는 승진시험을 앞둔 청장년들의 공부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전일도서관에는 광주·전남지역의 향토자료가 특히 많아 향토자료실의 역할도 했다. 향토자료실에는 시·군·구의 관광책자, 시·군지, 통계연보, 각급 학교의 요람, 교지, 각급기관의 간행물, 관내출판사들의 정기·부정기 간행물 및 도서를 수집 정리하여 이용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연구에 필요한 역사자료, 고문헌, 문집, 시·군·구 읍지, 학술연구논문집 등도 6,000여권을 모아 비치했었다.
족보자료실은 전국적인 자랑이었다. 성씨별로 수집한 자료가 내용면에서 전국적으로 자랑할 만 하였다. 족보는 문중별로 종가에서 보관해 왔는데 대동보나 가승보가 만들어지면서 소장가구가 늘었다. 그러나 대동보나 가승보가 없는 성씨가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족보에 누락되어 가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족보를 소장한 가정을 찾아내거나 서울대 규장각 소장 족보와 국립중앙도서관소장 족보를 복사하여 비치하였다. 또한 광주시와 전남도내 각 문중에 보관중인 족보를 기증받거나 복사하고 고서점에 나와 있는 족보를 구입, 정리하여 구보(譜)와 신보(新譜) 의 차이를 비교 검토한 뒤 누보자들의 가계(家系)를 찾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어 공공도서관의 설립이 가속화되면서 열람석을 축소하고 성인도서관으로 개편했다. 남봉 타계 이후 명칭도 남봉도서관으로 변경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으나 광주일보사가 매각되면서 소장 도서들을 전남대와 조선대학교애 기증하고 도서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전일도서관은 70,80년대 광주전남지역 학생들의 공부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에서 지역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봉순정< 전 남봉도서관 사서. 호남대도서관 학술정보운영과장>

mhtong@hanmail.net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