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 조동희 선생, 최장기 입주자 전일실업 김윤수 부장


설계자 월봉 조동희 선생

전일빌딩 10층 본관 건물의 설계자는 화가이자 건축설계자인 월봉(月峰) 조동희(82. 趙東熙) 선생이다. 1968년 12월 준공된 본관 엘리베이터 앞 지하 1층 지상 7층 설계자는 오무송(작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금남로변 본관과 외환은행, 그리고 옛 전남도청 방향의 희망교회가 있던 자리는 모두 월봉 선생이 설계한 것이다.
“남봉회장의 조카이자 제 친구인 김석준의 소개로 처음 만나 뵈었는데 정말 호탕한 분이셨습니다. 만나자마자 귀래정 식당으로 데려가 생고기를 사주시더니 한 20층 올릴 계획으로 설계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광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데다 전남도청 앞 광주의 얼굴이라 부담이 매우 컸다고 말한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신축당시 금남로변 주택 한 채를 매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건물을 지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던 일이다. 지금 세상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힘의 논리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시대였다고 회고한다. 전일빌딩의 사각기둥이 큰 것은 철제빔이 없었고 20층을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하나 극적인 일은 80년 12월에 준공된 희망예식장자리 신축문제다. 당시 이 부지는 조선대학교 소유였는데 박철웅 총장과 남봉 회장의 사이가 매끄럽지 않아 신축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전남도청이나 광주시에서는 ‘도심의 흉물’이라며 어떻게든 외양을 정리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 일도 제가 해결했습니다. 남봉회장의 아들인 김종태사장에게 아버지가 풀 수 없는 일은 아들이 풀면 되지 않느냐”며 조우환 전무와 셋이서 박총장을 만나러 갔다. 김사장이 공손히 도와주시라고 말씀드리자 흔쾌히 허락해주었고 이렇게 해서 현재의 전일빌딩이 완공을 보게 된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외환은행 자리다. 전일빌딩 5층을 짓고 있는 상황에서 돈이 다 떨어져 빌딩 일부를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또한 조동희 선생이 남봉회장으로부터 술값(?)을 받아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외한은행 건축 관련자를 만났다. 광주 1번지에 외환은행 광주지점을 하나 개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외한은행에 227평의 대지와 건물(지하1층 지상3층)을 매각한 대금으로 중단되었던 전일빌딩을 완공할 수 있었다.
“당시 남봉회장께 나중에 후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실제로 남봉회장 생존시에는 금남로 일대의 땅값이 평당 4~5천만원에 달한 적도 있어 후회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동희 선생은 전일빌딩 신축당시 금남로를 확장했는데 당시 시민들 사이에는 무슨 도로를 그렇게 넓게 만드느냐는 핀잔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금남로를 넓힐 때 김재식 지사, 남상집 시장 시절인데 훗날 선경지명의 일로 자랑했다고 한다.
조동희 회장은 현재 논의 되고 있는 전일빌딩 철거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외국의 경우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건물들은 오래도록 보존하지 않느냐”면서 광주의 미래를 생각하는 결정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월봉 조동희 선생은 영암출신으로 전남대 공대토건공학과에서 수학하다 1959년부터 현대건축사무소를 운영했으며 광주전남아마추어복싱연맹회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초부터 무궁화 그림에 천착해 한국미술공모대상전 대상 및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현충원 광장 초대전, 대한민국 무궁화 애국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청와대, 미국 백악관, 국방부, 국가기무사령부,대한민국헌정회, 육군보병학교, 국립현충원, 안중근기념관, 이순신기념관,김좌진 기념관, 독도기념관, 공동경비구역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최장기 근무자 전일실업 김윤수 부장

김윤수 부장

전일빌딩에서 36년 근무 … 전일실업 김윤수 부장

전일빌딩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은 전일실업 김윤수 부장(59)이다. 77년 10월 광주일보 총무국 전기부에 입사해 지난 7월까지 전일빌딩에서 근무하고 있다.
“제 인생의 전부가 전일빌딩에 담겨 있습니다. 취업에서부터 결혼, 자녀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들이 전일빌딩에 근무하고 있는 동안에 이뤄졌습니다.”
김부장은 전일빌딩에서의 삶이 나름대로 행복했지만 “전일빌딩이 경매되어 주인이 바뀌고 이제 철거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말한다. 초록 깃발과 함께 휘날리던 광주일보와 전일방송이 넘어가고 광주의 상징이던 전일빌딩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말못할 애환이 남는다는 것이다.
김부장은 전일빌딩에 근무하면서 전기와 소방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빌딩관리 업무라는 것이 꼭 구분이 지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온갖 잡일도 해야 했다.
“남봉미술관 오픈 기념으로 오지호 회고전을 개최할 때 그림을 지키느라 미술관에 야전 침대를 깔고 잤습니다.”
당시 관리책임자로부터 그림 한 점에 몇 천만원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삼양백화점을 오픈할 무렵에는 전단지를 깔고 숙직을 했다.
5.18 당시에는 결혼전이라 송정리 누님 집에서 출퇴근했다. 10일 동안의 항쟁기간에는 송정리에 있어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고 출근해서 전일빌딩 뒤쪽 공무국 자리 곡면유리에 송송 박혀 있던 총구멍을 목격했다. 이 곡면 유리는 기관에서 떼어갔다고 증언했다.
김윤수 부장은 광양출신으로 서울공고와 조선대 공대를 졸업하고 광주일보에 입사했다. 광주일보사가 대주에 경영권을 이양한 뒤 전일실업에 남아 전일빌딩 경매와 뒤처리까지를 처리한 ‘전일빌딩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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