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산장

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산장

전라북도 순창 쌍치면에는 추령천이 바라다보이는 풍경 좋은 곳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강학당인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189호 훈몽재가 있다. 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산장으로부터 훈몽재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산장

 

조선 중기에 호남 장성 출신인 하서 김인후 선생이 있어요. 공자 문묘에 배향된 어른이며 퇴계 선생과 동시대 인물인데 퇴계 선생이 하서 선생보다 9년 연상이지만 도반이었어요.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셨는데 그때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해서 많은 참신한 진보주의 선비들이 숙청을 당했어요. 그때 조정암 선생은 38살 때였고 하서 선생은 단 10살 때 그걸 목격하신 거예요. 조정암 선생이 조선 천지를 지상낙원으로 태평성세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가 그냥 역적으로 몰아서 아무 죄도 없는데 능주로 귀양을 보내서 죽여버렸어요.

거기에 관련돼서 죽은 분이 많고, 또 죽지는 않았어도 속세를 떠나 숨어버린 분도 많고, 그런데 다행히 하서 선생이 30세에 과거에 급제해 34살 때 세자(훗날 인종)를 가르치는 시강원 사부로 발탁되었어요. 중종대왕의 눈에 뜨인 거지요. 인물이 너무 특출하고 선풍도골로 세자 교육을 맡기면 쓰겠다 해서 특별히 세자 사부가 되신 거지요. 인종은 그때 6살 연하였어요. 그런데 인종이 하서를 사부로 만나기 전에 여러 사부를 모셨는데 심금을 울려주는 명강의는 못 들었던 거지요. 그런데 하서 선생은 인물이 우선 선풍도골로 특출하시고 도학에 대한 강의나 정치에 대한 강의를 해주실 때 천하의 명강의, 즉 전에 못 듣던 강의를 들려주니, 인종의 귀가 확 트인 거죠. 유학이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세자와 하서가 찰떡궁합이 되었어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하서 선생이 숙직할 경우에는 세자가 신분을 초월해서 하서 선생이 숙직하는 방에까지 오셔서 밤늦도록 토론하고, 사부에게 홀딱 빠져버렸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조정암 때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인종이 임금이 되고 하서가 중역이 되면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야 일이 되는 거잖아요. 소열황제(유비)와 제갈공명이 만나듯이, 임금만 있어도 안 되고 제갈공명만 있어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느 날 인종이 묵죽을 그려 하서에게 드렸어요. 바위가 있고 그 사이에 대나무 세 줄기가 나온 그림이에요. 누구에게도 그림을 그려서 준 분이 아닌데, 하서에게만 유일하게 주신 거예요. 그것은 무엇이냐? 앞으로 군신 간에 이 바위와 대나무처럼 어우러져서 변치 말고 한번 우리 함께 해보자 이런 이야기였지요. 하서 선생이 거기 묵죽에 대한 시를 쓰셨는데 지금 그게 보존돼 오고 있어요.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중종을 낳은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이분이 문정왕후죠. 문정왕후가 공주만 낳을 때는 야심이 없었는데 나중에 경원대군을 낳고 나서 야심이 생겨 ‘인종 세자가 없다면 내가 낳은 경원대군이 임금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아주 못살게 굴었어요. 세자를 태워 죽여 버리려고 밤중에 동궁에 불을 질러버렸어요. 인종은 장경왕후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나 하나만 사라져버리면 궁중이 편안해지겠다’고 하고 아예 불에 타죽으려고 안 나오려고 했어요. 중종이 “아무개야, 나오너라, 나오너라….” 해도 대답도 않고 나오지 않았어요. 그때 인종의 귀인이던 송강 정철 선생 누님이 그 불 속에 뛰어 들어가서 강제로 끌고 나오다시피 해서 구출을 했어요.

그 뒤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임금이 됐는데, 어느 날 문정왕후에게 아침 문안을 들어가니 평소 문안 들어가면 살기가 돋아서 인종을 질시하던 문정왕후가 그날따라 “주상….”하면서 부드럽게 대해요. 그러면서 식혜 한 그릇을 내 와 “주상, 드세요.” 했지요. 그게 독약이 든 식혜였지요. 인종도 그걸 알아차렸지만 복잡하고 피비린내가 날 것 같아 궁인한테 마시라 하지 않고 ‘나 하나 가면 궁중이 편안할 텐데…….’ 하고 마셨던 거지요. 그대로 쓰러지셨지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하서 선생이 궁중에 권력 암투가 있어 인종이 제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아 당신을 약방 도제조로 임명해달라고 인종한테 청했는데(모든 것을 당신이 검열해야 하니까), 인종이 그걸 안 들어줬거든요. 당신 선생을 어떻게 약방 도제조를 만드냐고요. 이에 하서 선생은 “그럼 신은 시골에 계신 노친을 봉양하러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옥과 현감으로 내려갔어요. 그때 독살된 거지요. 하서가 그 소식을 듣고 기절하고 까무러쳐버렸어요. 큰 꿈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거지요. 그 길로 벼슬을 그만뒀어요. 그때 36살 때인데 벼슬 그만두고 돌아오셔서 51살에 세상을 뜨셨는데 일체 서울에 발걸음 한 번도 안 했어요. 벼슬이 이것저것 여러 차례 내려왔지만 실권이 아니고 들러리 서는 것, 지금으로 말하면 성균관 시간강사, 성균관 도서관 사서 같은 것이었지요.

하서 같은 이런 어른이 참신하니, 그 큰 어른이 올라가면 기득권층에는 백만 대군을 얻은 것과 같지요. 하서같이 큰 사람도 올라와서 우리에게 협조한다. 그게 자기들에게는 크게 이롭지요. 그러나 하서 선생은 그런 자들의 속셈을 뻔히 아는데 올라가겠어요? 그래서 한번은 홍문관 교리로 올라오라고 하니까 계속 사양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술 스무 말을 빚어서 걸러 마차에 싣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장성 집에서 출발해 가다가 국화꽃만 피었어도 거기다 수레 멈춰놓고 거기서 술 마시고, 지나가다 좋은 것 있어도 마차 멈춰놓고 술 마시며, 장성서 하루 거리도 안 된 거리를 사흘을 걸려 장성 갈제쯤 왔는데 스무 말 술이 다 떨어져버렸어요. 그래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병나서 못 올라가겠소, 했지요. 멋지지요? 낭만적이지요? 그러니까 하서 선생을 낙천적이면서도 속에는 철장이 들어있다고 했어요. 선비는 그래야 되거든요. 바람결에 실버들처럼 바람 부는 대로 하늘거리면 그게 선비인가요? 그래서 훈몽재를 짓고 여기서 강학하신 거지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송강 선생이 정승까지 하신 분이잖아요. 정치가요, 문학가요, 풍류가요, 멋쟁이 남자지요. 그래서 여기 강가에 가면 하서가 송강 데리고 대학을 가르치던 바위가 있어요. 꼭 자라처럼 생겨 자라 바위라고 하는데 거기서 송강이 대학을 배웠다고 해서 대학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요. 그런데 하서 선생은 장수하지를 못하시고 51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하서 선생 돌아가신 뒤에 훈몽재가 황폐해버렸어요. 150년 뒤에 그 5대손 자연당 이라는 분이 장성에서 넘어와 황폐했던 자리를 다시 개척해 훈몽재를 복원하고 당신이 거처하는 곳에 자연당을 짓고 강학을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또 황폐해져 정종 대왕 때 여기서 하서 서원을 지었고 어암서원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훈몽재도 복원되고 했는데 6·25 때 군경이 불질러버렸어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6·25 때 하서 선생 후손이 13살 때 훈몽재가 불태워지는 전경을 봤어요. 그때 그 아버지도 군경에 죽었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밑바닥 인생살이를 했지요. 어머니는 식모살이하고 자기는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그리 저리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돈을 좀 많이 벌었어요. 냉면집을 했는데 그 어머니가 전라도 음식솜씨로 얼마나 맛깔스럽게 잘했던지 그 냉면집이 유명해져서 사람이 모여드니까 하루에 손님이 3000명까지 왔대요. 그 주변 부지를 사서 주차장 만들고 시설도 더 잘하고 음식 맛도 좋고 하니까 거기서 돈을 많이 벌었대요. 그 어머니가 세상 떠나면서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상렬아, 이제 살만하니까 고향에 불우한 사람도 돕고 장학사업도 하고 좋은 일 해라.” 하셨대요.

상렬 씨는 어머니 유언을 따라 그렇게 했어요. 순창군에 장학금을 수억씩 내려보내고, 쌍치면에는 마을마다 노인들을 노인정에 몇백만 원씩 내려보냈어요. 한편 순창군에서 훈몽재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터가 후손 땅으로 된 것이 아니라 타성 땅으로 되어 있어서 비싸게 달라고 했대요. 그래서 진행하고 있지 못하다가, 상렬 씨를 만나 우리(순창군)가 복원할 테니 땅만 누가 기부해 주면 복원하겠다 한 거예요. 이에 상렬 씨가 “좋다, 내가 기증하겠다.” 해서 산꼭대기까지 수십만 평을 사버렸어요. 땅을 막상 사려니, 파는 분이 부동산과 짜고 두 배로 올려 받았어요. 그런데 상렬 씨는 조상일 하면서 이러니 저러니 할 것 없다며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사서 순창군에 기부했어요.

그래서 순창군에서 훈몽재를 복원한 것이지요. 그리고 현재의 훈몽재 뒤뜰에 일반인 상대로 교육하려고 가칭 연수관을 50억 원 들여서 지을 계획인데, 그 터도 역시 그 상렬 씨가 또 내놨어요. 대단하죠?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훈몽재를 복원한 후 순창군 군수가 하서 선생 후손측 도유사에게 훈몽재에 와서 상주하면서 강학할 사람을 추천해달라 했었답니다. 그때 내가 강원도에 서당을 짓고 강학하고 있을 때인데 나를 추천했던가 봐요. 군수가 순창으로 와달라고 산중에 직원을 네 차례 보내서 오게 되었네요.

그래서 2011년에 내려왔어요. 당시 제 생각에 타향인 강원도 산중에서 강학하는 것보다는 고향 가까운 데로 내려와서 하서 선생 강당에서 그 지방의 유지들을 키워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다 싶어서 내려왔어요. 여기 내려오니까 그동안 연결돼 있던 성균관대에서도 학생들이 내려오고, 경희대에서도 내려오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도 내려오고, 각 지방의 학생들이 들어오니까 겨울 방학이면 훈몽재가 꽉 차요. 그리고 휴학하고 1년씩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차츰차츰 훈몽재가 제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어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처음에 내려와서 자취할 때가 지금처럼 가을이었는데, 여기는 청정지역이라 반딧불이 날아다녀요. 마당에서 산책을 하는데 저 추령강에서 반딧불 하나가 나타나서 훈몽재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물가로 가요. 몇 차례를 그러더니만 마당에 있는 나를 맴돌더라고요, 그것참 희한하지요. 나 혼자 중얼거렸어요. ‘지금 유학의 불빛이 너무 꺼져가기에 내가 반딧불 역할이라도 하겠다고 이 산중으로 들어왔는데, 네가 어찌 내 마음을 알고 나를 돌고 있느냐? 네가 나를 아는구나.’

그래서 그때 핸드폰을 꺼내서 연세대학교에 있는 박관규에게 전화를 했어요. 지금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반딧불 서를 하나 지어놓은 것이 있거든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훈몽재가 지금은 국내를 넘어 중국에까지 알려져서 중국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요. 훈몽재가 이제는 국제적인 강당이 되었어요. 중국과 교류를 하며 제가 자금을 조달했었는데 군수를 만나 이제부터는 군에서 지원을 해 달라고 해 지원을 받기로 했어요.

훈몽재가 이제는 국내를 초월해서 국제적인 강당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우리들을 초청하면 들어가요. 그리고 백록동 서원에서 강학을 해요. 우리가 들어갈 때면 훈몽재 식구들하고 뜻 있는 사람들하고 십여 명씩 함께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올 때까지 중국에서 숙식을 제공하며 이렇게 서로 교류하고 있어요.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훈몽재는 조선 명종 3년(1548) 하서 김인후 선생이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 이후, 1680년경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다. 1820년경 김인후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현재는 복토작업이 이루어져 있다.

호남 선비정신의 정수가 깃든 ‘훈몽재’를 찾아

2003년 강인형 순창군수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정신과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역사적 가치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훈몽재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에 이 지역 출신이자 후손인 백은(栢隱) 김상열(金相烈) 선생이 거액을 들여 ‘훈몽재 유지’로 추정되는 부지를 매입하고, 이를 순창군에 기부하여 6년에 걸쳐 2009년에 훈몽재와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으로 이어지는 목조 한옥을 복원하였다.

2011년 1월부터 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선생이 훈몽재 산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훈몽재에서는 예절교육 및 한학 등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더불어 숙박공간을 조성하여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2013년에는 수강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집합 교육 시설과 취사장을 갖춘 양생당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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