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가장 오래된 식당은 나주‘하얀집’ 두 번째가 해남 ‘천일식당’


광주전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어디일까.
최근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펴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에 따르면 나주에 있는 나주곰탕의 원조 ‘하얀집’으로 되어 있다. 1910년에 문을 열었으니 102년이 된 셈이다. 그 다음이 1924년에 문을 연 해남 천일식당이다. 떡갈비가 유명한 곳이다.
이 책은 50년 이상 된 한식당 100곳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식당은 1904년 개업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이문설농탕’이다. 소의 각종 뼈와 고기를 넣고 17시간 우려낸 7000원짜리 설렁탕은 여러 명사의 입맛을 사로잡아 왔다. 최근엔 일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으면서 하루 500~600그릇 정도가 팔린다고 한다. 오래된 식당은 대부분 설렁탕, 국밥, 냉면, 비빔밥 등 서민 음식을 주 메뉴로 하는 게 특징이다. 서민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집들이 오래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오래된 식당 100개의 분포를 보면 서울이 28곳으로 가장 많고, 전남 12곳, 부산 11곳, 경남 9곳 순이다. 광주·전남에서 가장 오래된 12곳의 식당을 찾아가 본다. <편집자 주>

하얀집/ 100년 넘는 나주곰탕의 원조 /Since 1910
나주의 대표음식은 누가 뭐래도 곰탕이다. 스스로 원조임을 내세우는 곰탕집만도 여러 개다. 나주곰탕 하얀집은 4대에 걸쳐 100여년 넘는 세월동안 곰탕집을 하고 있다.
고(故) 원판례 할머니가 도축장이었던 시장 한쪽에서 된장국과 콩나물국에 서너 가지 반찬을 올린 백반을 팔았고 6.25 직후부터 곰탕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2대는 며느리 임이순 할머니, 3대는 길한수씨, 4대는 지금의 길형선씨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가마솥에 한우사골을 넣고 그 위에 머릿고기나 양지머리, 아롱사태, 꼬리 등을 쌓아올려 끓인다. 특히 나주식곰탕은 뼈와 고기를 오랫동안 고면서 계속 기름을 걷어내기 때문에 국물이 맑고 진하다. 곰탕이란 뼈와 고기를 오래 고았다는 뜻으로 ‘고운국’ ‘곰국’으로 불리다가 곰탕으로 굳어졌다.
나주곰탕의 원조로 ‘지정서’까지 받은 ‘하얀집’은 고기 고유의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 전혀 양념을 하지 않고 고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곰탕에 넣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고기에 붙은 기름기도 떼어내야 한다. 3시간 정도 센불에서 끓이다 기름기를 걷어낸 뒤 고아야 한다. 고기는 꼬치로 찔러보아 익었으면 건져내어 결 반대방향으로 썰어 다시 국물에 넣는다. 날마다 담구는 김치와 깍두기도 곰탕과 궁합을 이룬다.
꼬리, 양 등을 삶아 썰어낸 수육은 담백하고 쫄깃쫄깃한 맛을 내는데 안주로 그만이다. 수육 한 접시에는 3만원(대), 2만원(중)이며 대는 넷이서, 소는 셋이서 나눠먹으며 곰탕(7천원) 한 그릇이면 배가 어지간히 부르다.


천일식당/ 3대 이어온 참게장 별미/Since 1924
90년 역사의 천일식당은 해남의 대표식당이 아니라 전라도 대표식당으로 전국에 이름이 나 있다. 1995년 한국전통음식보존회가 ‘맛있는 집’으로 지정했는가 하면 한국관광공사 선정 100대 음식점, 전남도 남도음식명가, 한식재단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식당’ 지정 등 유명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은 서울 분점(?)이 운영될 정도다.
천일식당은 손맛 좋기로 유명한 고(故) 박성순 할머니로부터 시작돼 며느리 고(故) 이정례씨를 거쳐 현재 오현화씨가 3대를 이어가고 있다. 박성순 할머니의 음식맛이 알려지면서 관공서에서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왔고 여기에 힘입어 ‘천일관’이란 고급식당을 차렸다. 가정식 백반을 비롯해 애저, 아귀찜, 장어구이 등이 특히 맛이 있었고 1960년대 초 며느리 이정례 할머니가 전문화된 식당으로 키워 떡갈비를 대표메뉴로 하여 한정식을 개발했다. 천일식당의 떡갈비는 갈비뼈에 있는 살점 하나하나를 발라내 칼집을 내고 여기에 배즙, 참기름, 마늘, 생강, 파 등 20여 가지의 양념을 넣어 한나절 재워 숯불에 굽는데 육즙이 적당하고 씹는 맛이 일품이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갈치창젓, 토하젓, 돔배젓, 게장 등이 한그릇 밥을 부족하게 한다. 이집 젓갈이 유명한 것은 해창만에서 나는 젓갈류를 사다가 소금으로 간을 해놓았다가 1년 후에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내놓기 때문이다. 특히 세발낙지, 참게장은 이집의 별미다.
천일식당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 집의 젓갈 맛을 보고 크게 반한 후 해남을 찾은 기관장들은 반드시 이곳의 젓갈 맛을 보고 갈 정도다. 현재 주인은 이정례씨의 며느리 오현화씨다. 오현화씨는 시어머니의 전설적인 젓갈 맛에 떡갈비를 더해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떡갈비 정식 25,000원 불고기정식 19,000원


삼대광양불고기집/ 3대를 이은 광양불고기 원조/ Since 1930
광양불고기집은 1930년에 문을 열었으니 80년 역사가 넘는다. 이소은 할머니가 ‘일흥식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광양불고기를 처음 선보인 뒤 2대 이영조씨를 거쳐 지금은 3대 이형중씨가 이어가고 있다.
이소은 할머니가 시작했을 때는 불고기를 숯불에 구워먹는 방식이었고 2대 이영조씨가 광양숯불구이를 메뉴화해 1954년 ‘광양 불고기식당’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하여 광양숯불구이가 불고기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1970년대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알려지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양불고기와 차별화를 갖기 위해 ‘삼대광양불고기집’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집의 가장 큰 특징은 놋쇠화로에 참숯불을 넣어 구리석쇠에 고기를 굽는다는 것이다. 광양불고기는 한우고기를 잘 저민 뒤 간장 소금 설탕 참기름 마늘 등을 섞은 양념에 버무려 낸다. 숯불구이는 그때그때 양념을 해야 육즙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식사를 주문하면 먼저 깨죽이 나오고 상추·깻잎 등의 야채와 물김치, 배추김치, 갓김치, 젓갈 등이 한 상 가득 나온다. 불고기 1인분에 15,000원이다.


신식당 /담양 떡갈비의 본가 /Since 1932
담양 신식당은 1932년에 문을 연 80년 역사의 식당이다. 그러나 남광주 할머니가 떡갈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인 1909년부터다. 신식당의 떡갈비는 며느리 신금례 할머니를 거쳐 3대 이화자, 4대 한미희씨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떡갈비의 본가(本家)라 할 수 있다.
음식에 남다른 솜씨를 지녔던 남광주 할머니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온 뒤 가끔 고을 수령의 요청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널리 소문이 났고 많은 사람들의 권유로 지금의 자리에 작은 식당을 냈다. 이를 며느리 신금례씨가 이어받아 신씨 성을 따 신식당이라 이름붙이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떡갈비를 만든 것은 아니고 먹기 쉽고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다. 갈비가 떡같이 생겼다고 하여 떡갈비라고 부른다.
신식당의 떡갈비는 우선 국내산 한우갈비를 주재료로 갈빗대와 갈빗살만 사용한다. 다른 부위나 야채 등을 혼합하지 않아 한우 본연의 맛과 담백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재료가 잘 어우러진 신식당의 소스를 골고루 발라가면서 참숯에 굽는 게 신식당 떡갈비의 매력이다.
신식당의 또 하나의 자랑이라면 ‘정직’이다. 창업 때부터 현재까지 천연조미료인 장류를 엄선된 국내산 고추와 콩, 천일염을 직접 구입해 담근다. 신식당 떡갈비가 소문이 나면서 유사 떡갈비집들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며느리도 모르는 그 맛’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때문에 체인점 권유도 받고 있지만 당분간 ‘그 자리에서 그 맛만 지키겠다’는 각오다.
떡갈비 1인분에 29,000원 갈비탕 12,000원, 후식 잔치국수 3,000원 등이다.


영명식당 / 갯벌은 사라졌지만 낙지는 ‘永明’ / Since 1940
영암군 독천면 독천리 일대는 낙지거리로 지정돼 30여 곳의 낙지전문식당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 1940년에 문을 연 영명식당이다. 이곳이 낙지로 유명해진 것은 1980년대 초 영산강 하구언을 막기 전까지 세발낙지로 소문난 ‘미암낙지’를 가져와 즉석에서 요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고(故) 김영임 할머니가 백반을 파는 밥장사를 시작했는데 손맛이 어찌나 좋은지 손님들을 사로잡았다. ‘영명(永明)’이란 이름도 어떤 손님이 ‘오래도록 밝게 빛나는 집’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70년이 넘었다.
낙지를 전문으로 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다. 갯벌은 사라졌지만 영명식당의 낙지는 ‘영명’하고 있고 연포탕, 낙지구이, 낙지다짐, 탕탕비빔밥 등 다양한 메뉴를 개발했다.
지금은 며느리 정귀순씨가 대를 이었는데 시어머니의 솜씨를 그대로 전수받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정귀순씨가 직접 담근 젓갈반찬은 시어머니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는다. 새우젓, 굴젓, 전어창젓이 유명하며 갓지 또한 입맛을 돋운다. 정씨는 시대에 맞게 깔끔하고 청결한 밥상으로 대(代)를 이어가며 손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연포탕 17,000원, 갈낙탕 17,000원, 탕탕비빔밥 15,000원


원조창평시장국밥 / 국밥의 대명사 창평국밥의 원조 /Since 1949
우리나라 국밥의 대명사인 ‘창평국밥’은 이집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다섯 칸짜리 판자집에서 국밥장사를 했지만 중간에 그만 두고 원조창평국밥만 3대를 이어가고 있다. 1949년에 문을 열어 전쟁 통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곳이다.
멍석 위에 판자로 탁자를 만들고 대여섯 사람이 앉아 허기를 채우던 집이다. 조지옥 할머니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국밥집을 열어 아들, 딸을 키워낸 눈물이 숨겨진 집이다. 지금은 며느리 전현숙씨에 이어 손부 양금례씨가 3대째 대를 이어가고 있는데 전현숙씨가 할머니 생전에 비법을 전수받았다. 원조창평시장국밥이 유명해지면서 ‘전현숙 창평국밥’이라는 이름으로 광주에서 시동생이 체인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1980년대까지는 장날만 장사를 했으나 이후 교통이 편리해져 주말이면 가족단위로 찾는 사람이 많아 날마다 문을 연다.
원조창평시장국밥의 비법은 무엇일까. 새벽마다 육가공공장에 직접 가서 막 잡아 김이 나는 내장이나 새끼보 등을 사다가 찬물로 씻어낸다. 빨래판에 놓고 비비고 기름기가 많은 윗보는 칼로 돌려낸다. 70년 가까이 찾아오는 단골들을 위해 만드는 음식이니 조금도 소홀할 수 없다. 고기에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비법이며 육수는 돼지뼈와 무만 넣어 만들기 때문에 담백하다. 손님이 오면 현장에서 고기와 밥을 넣고 국물에 몇 번 담궜다 꺼내 파와 다데기, 후추를 넣어 내놓는다.
반찬은 깍뚜기와 배추지,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새우젓, 양파정도다. 그래도 유명세가 붙어 줄을 서야하는 날이 많다. 매년 배추김치만 6천여포기를 담가야 일 년을 보낼 수 있다니 짐작이 간다. 이 집 때문에 다른 집들도 함께 재미를 보고 창평국밥은 국밥의 대명사가 되었다. 창평가마솥 국밥, 전통창평국밥, 옛날황토방국밥, 창평장터국밥, 창평국밥 등 얼른 보아서는 원조를 찾기 힘들 정도다.
밥과 국을 따로주는 따로국밥은 7,000원이고 나머지 내장국밥, 소머리국밥, 선지국밥, 콩나물국밥 6,000원, 국밥에 국수를 말아주는 국수는 4,000원이다.


국일식당 / 쫀득쫀득한 벌교꼬막의 맛 / Since 1952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남도여관’은 실제로는 보성여관으로 최근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새롭게 단장해 나그네가 머물 수 있는 여관이자 문화공간으로 재단장 해놓았다. 이 보성여관 바로 앞에 있는 국일식당(1952년 개업)이 바로 60년 동안 벌교꼬막의 맛과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곳이다. 고(故) 조정자씨가 식당문을 열어 장사를 하다가 지금은 며느리 하옥심씨가 대를 이었는데 그도 환갑이 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꼬막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제철인데 순천만과 보성만에서 나오는 꼬막이 국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옛부터 벌교꼬막이 유명한 것은 보성만과 순천만에서 나온 꼬막이 벌교역을 거쳐 외지로 나갔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꼬막정식을 시키면 삶은 통꼬막에서부터 꼬막전, 꼬막된장국, 꼬막무침을 기본으로 하여 삼합과 멍게, 피조개회, 생굴무침 등이 계절에 따라 나온다. 꼬막을 삶을 때는 주걱으로 한쪽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지만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타고난 감각이 아니면 안 된다. 조금만 오래 삶으면 질기고 또 조금만 덜 삶아도 뻘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꼬막삶기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하옥심씨가 말하는 제대로된 꼬막삶기는 어떤 것일까. “꼬막은 핏물이 빠지지 않게 살짝 삶아야 하고 껍질을 깠을 때 핏물이 아롱아롱 맺혀 있는 상태로 삶아야 한다”는 것이다. 꼬막정식 15,000원, 백반(대) 15,000원 (중)10,000원, (소)7,000원.


시내식당 / 광양불고기와 ‘빨간국’의 만남 / Since 1955
1955년에 문을 열어 60년 외길을 걸어왔다. 도축업에 종사하던 원길수씨가 시내식당을 시작했는데 맛이 뛰어나고 인심이 후해 늘 손님들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원씨가 식당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평소 가까이 지내던 배일선씨에게 권유해 이어받게 된다. 친척이 아니라 성실과 정직으로 식당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1년 가까이 비법을 전하고 식당경영 노하우를 전수해 광양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점으로 성장시킨 것.
시내식당은 외국인들도 불편하지 않도록 모두 테이블 룸으로 만들었으며 한꺼번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실도 갖추고 있다. 맛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설을 현대화 했다.
시내식당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빨간국’으로 불리는 얼큰한 김치국이다. 굽다가 남은 고기를 빨간국에 넣어 끓여먹은데 이 또한 별미다. 불고기 1인분에 18,000원이다.
한편, 광양숯불구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여러 가지 유래가 있지만 조선시대 선비가 말했다는 ‘마로화적’ 얘기가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떤 선비가 광양에 귀양 와서 천민의 자녀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 천민이 보은의 뜻으로 암소 한 마리를 잡아 참숯을 피우고 석쇠에 구워 접대했다는 것. 그 선비가 한양에 돌아가 ‘천하일비 마로화적(마로는 광양의 옛이름이라고 함)’ 이라며 그 맛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목리장어센터 / 매실과 복분자로 만든 양념장 /Since 1957
강진의 탐진강은 보성, 장흥, 영암, 해남 등 아홉 군데의 물이 합쳐져 구강포로 흘러간다. 그래서 구강이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민물장어가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리교 건너편에 장어통조림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목리교 아래에서 간판도 없이 시작한 ‘짱어집’이 지금의 목리장어센터다. 1957년에 시작해 1990년대 중반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장어만 전문으로 한다고 해서 장어센터라 이름을 붙였다.
6.25 직후 고(故) 한양수씨가 탐진강에서 직접 장어를 잡아 구이도 해주고 탕도 끓여 팔았으며 이후 아들 한춘재씨가 대를 이어 2011년까지 운영하다 지금은 이창현씨가 인수했다. 대를 잇는 것은 2대로 끝났지만 음식의 맛은 그대로 이어간다. 이창현씨가 한춘재씨로부터 장어구이 양념과 굽는 방법 등을 그대로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목리장어센터에서는 지금도 자연산 장어를 먹을 수 있다. 물론 예약을 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좋은 장어를 맛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양식장어를 사용하는데 일정시간 깨끗한 민물 수족관에 넣어 해독시킨 뒤 사용한다. 반찬으로 제공되는 채소도 모두 주인 부부가 텃밭에서 기른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리장어센터를 잊지 못하는 것은 장어뼈 육수 때문이다. 몸에 좋은 한약재를 넣어 24시간 끓여서 서비스로 제공하는데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본 음식인 장어구이는 설탕이나 조미료를 쓰지 않고 매실과 복분자 등 자연산 재료만을 사용하고 숯불에 구울 때도 양념장을 여러 번 덧발라 양념이 골고루 스미게 한다. 소금구이는 소금구이대로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장어구이집이지만 반찬은 한정식집에 손색이 없다.
장어양념 및 소금구이는 22,000원이다.


완도횟집 / 이청준 선생의 ‘馬良二景’에 나온 그 집 / Since 1958
고(故) 김양심 할머니가 1958년부터 운영한 완도식당이 모체다. 손님이 많지 않던 시절 마량포구에서 회를 팔기 시작했는데 어죽이면 어죽, 지리면 지리 등 못하는 것이 없어 항상 손님들이 붐볐다. 완도횟집은 장흥출신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비롯 많은 문인과 탤런트들이 즐겨 찾기로도 유명하다. 이청준 선생이 ‘마량이경(馬良二景)’이란 시에서 ‘완도집’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시에 나오는 ‘아낙네’가 바로 김순자씨로 시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배운 40년 베테랑이다.
지금의 완도횟집은 회를 주 메뉴로 한 한국형 횟집이다. 손맛이 있는 주인이 직접 담근다는 10여 가지의 젓갈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하는 깊은 맛이 숨어 있다. 매운탕은 물론 지리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을 선별해 쓰기 때문이다.
생선회는 1인분에 2만원 선이고 매운탕 4만원(대) 3만원(중) 이다.


두암식당 / 3년 숙성시킨 짚불에 삼겹살 구워 /Since 1960
무안 두암식당은 짚불구이의 원조다. 1960년 김정순 할머니가 문을 열어 지금은 며느리 정소례씨가 대를 이었다. 처음에는 식육점으로 한쪽에 고기를 구워 막걸리를 팔았는데 식당으로 발전했다. 두암이란 이름은 할머니의 친정동네 이름이다. 어렵게 살던 할머니에게 친정동네 사람들이 초가집을 지어줘 장사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두암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쌓아놓은 짚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짚단은 최소한 3년 이상 묵힌 것이다. 농약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하고 화력을 최고로 살리기 위해서는 3년 이상 되어야 한단다.
3년 이상 숙성시킨 볏짚에 삼겹살을 석쇠에 올려 짚불에 40초 정도만 구워내면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짚불구이가 된다. 기름기가 적당히 빠지고 짚 특유의 깊은 맛이 그윽하게 스민 그 맛을 무엇에 비교할까. 밑반찬으로 나오는 양파김치와 게장, 새우젓도 별미다. 밥상에 오르는 모든 반찬은 주인부부가 직접 논밭에서 재배한 것이다. 삼겹살도 무안의 농가와 계약을 맺어 좋은 고기만 쓴다.
짚불구이 1인분에 10,000원이고 식사는 게장비빔밥으로 하는데 3천원이다.


덕인관 / Since 1963
담양떡갈비의 대명사담양 덕인관은 50년 역사를 간직한 식당이다. 장막래 할머니가 인동장씨 18대 종부로부터 전수받아 담양의 밀양박씨 집안으로 시집온 뒤 1963년에 ‘덕인음식점’이라는 숯불갈비집으로 창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개업 당시에는 백반한정식의 고기반찬의 한 종류로 상에 올랐다. 1960년대 말 담양등기소에 재판하러 온 광주법원 판사들의 요구에 의해 떡갈비를 기본으로 하는 백반한정식을 내놓다가 광주지역 V.I.P 접대를 위한 특별음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담양떡갈비는 1970년대초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담양의 전통향토음식으로 자리잡았다. 덕인관의 떡갈비는 분쇄하거나 다지지 않는 전통식 떡갈비 제조방법으로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든다.
그래도 덕인관은 전통제조방법을 고집해 1997년 남도음식대축제에서 향토음식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2003년에는 ‘남도음식 별미집’(전라남도지정), 2007년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대한민국 베스트 한식당 100곳’, 2009년에는 ‘남도음식명가’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2년 농림수산식품부에 의해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 100선’에 당당히 이름을 내걸었다.
덕인관의 갈비는 담양에서 나오는 1등급 한우만을 골라 갈비등판살과 지방부분을 분리한다. 갈비뼈에서 안창살을 분리해 채를 썰고 나머지 갈비 1번대부터 13번대까지 26개를 낱개로 분리, 4~5 ㎝로 절단한다. 지방부문을 제거하고 잔 칼집을 내어 양념이 고루 배이도록 1,2,3차 양념을 하여 떡갈비 모형을 만들어 구워낸다.
덕인관은 떡갈비 제조 관련 특허를 5개나 갖고 있으며 ‘덕인푸드코리아’ 등 3~4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지리산과 화순에 체인점을 내어 주었다.
덕인관은 현재 아들 박규완씨(53)가 이어받았으며 가족들이 힘을 모아 운영하고 있다. 갈비도 맛있지만 대추와 은행을 넣어 만든 죽통밥과 오징어젓 등의 밑반찬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떡갈비 1인분에 27,000원, 대통밥 11,000원, 추어탕과 곰탕은 각 8,000원이다. 넓은 주차장과 백일홍이 활짝 핀 정원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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