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최초의 양복점은‘와다나베’ , 양장점은‘모나미’가 최초


광주최초의 양복점은 1920년대 초 일본인 와다나베가 지금의 충장로 1가 조선대학교동창회관 자리에 문을 연 와다나베 양복점이다. (박선홍 지음 광주 100년). 러시아 양복점이 거의 같은 시기에 오픈했는데 러시아 사람이 주인이자 기술자였다. 러시아 양복점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무렵 사라졌다.
와다나베는 대단한 기술자로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했는데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은 모든 과정을 제대로 거쳤다. 아이롱이라고 불리는 다리미에 불을 달구는 것부터 다리미질, 바느질, 박음질을 거쳐 바지와 윗도리를 만들고 그다음 조끼를 배웠다. 마지막 단계가 예복을 짓게 되는데 이쯤 되면 고급기술자로 대접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양복점 문을 열었다.
와다나베 양복점 출신 한국 기술자로 처음 양복점 문을 연 사람은 임(林)씨였는데 양복점 간판은 자신의 성을 따서 임옥(林屋)양복점이라고 하였다. 임씨는 당시 와다나베 양복점의 최고 기술자로서 대접 받았으며 고급 양복을 취급하였다. 그는 주인이자 스승인 와다나베가 고국으로 돌아가자 충장로 5가에 문을 열었는데 당시 다른 양복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양복을 입을 사람들이 많지 않아 주로 기관의 제복이나 학생복을 주로 취급하였다.
일제말기인 40년대 초에 문을 연 양복점은 충장로 4가 신진양복점(신00)·신성라사(박봉래)·미림양복점(조월두)·용원양복점 등인데 용원은 만주에서 양복기술을 배워 온 서씨와 최씨 등이 합자해서 세운 양복점이다. 신성라사는 박봉래에 이어 아들 박승용이 가업을 이었다.

광주에 많은 양복점이 생겨난 것은 해방 직후다. 그 때 문을 연 사람은 와다나베나 양복점, 러시아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다.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기술을 배워와 일본이나 러시아에서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믿을 수 없었다. 기록으로 보면 대흥양복점(김백운)이 1945년에, 남성양복점이 1946년에 문을 연 것으로 되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금남로 3가 지금의 뽐뿌집 건너편 코너에 있던 중앙양복점과 파리양복점(김영묵)이 문을 열었다. 중앙양복점은 최진오라는 사람이 주인인데 그의 부인이 황금동 부근에 노라노양재학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양장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중앙양복점은 60년대 초부터는 전주출신의 조남석이 운영했다.
1950·1960년대 충장로 5가에서 구역전통 사거리 일대가 잡화상이 번창했을 때 1가~4가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잠식했다. 충장로 일대에 있던 양복점은 대흥·중앙·한성·십자옥·국제·파리·천일·동신(황00)·서울(최준성)·협창(이종성)·광춘·안성(정00)·미진사(박만기)·신영·영광사·영창사(박00)·이영진양복점·국일(박승현) 등이다. 60년대 후반에 대성·미림·미도파·명보(양동혁)·런던(정경모) 등이 생겼고 70년대 후반 들어 대지·대성·신영 등이 문을 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양복점은 대흥양복점·십자옥·양복점·한성라사·이영진양복점·태창라사(임대식) 등이다. 광주·전남 기관장들이나 멋쟁이들은 거의 대부분 이들 양복점에서 옷을 맞췄다. 선물도 이들 양복점의 것이라야 대접을 받았다. 특히 이영진양복점(충장로3가)의 이영진은 서울에서 온 유명 디자이너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70년 중반 이후에는 런던양복점이 가장 유명세를 탔던 시절도 있었다. 태창라사는 임대식이 금융업으로 전업하면서 기술자였던 문병인이 72년 양복점을 인수받아 광주극장 옆에서 계속하고 있다.

양복 한 벌 값은 대략 쌀 7~10가마 값이었다. 지금처럼 옷감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옷값은 기술력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100~120만원정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959년 광주인구 30만 6천 5백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70년대 대광라사
1959년 광주인구 30만6천5백명
지금까지 대광라사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박종식씨(80)는 14세 때 파리양복점에서 양복일을 배우기 시작해 25세 때인 1957년 충파 건너편에 대광양복점 간판을 달았다. 이후 화니백화점 후문 쪽에서 대광백화점을 운영하다 화니에 넘겨주고 충장로 4가를 거쳐 현재의 금남로 4가로 옮겼다.
충장로 5가 화신라사는 당시 제일모직 특약점을 운영했던 김익봉의 4촌이 주인이다. 십자옥 양복점은 김용복이 운영했고 태창양복점과 한성라사는 임택모(대한모방 특약점)의 조카들이 운영했다.
양복점의 전성기는 70년대로 이른바 홍파이루오바가 유행했던 시절로 알려진다. 대광라사는 이른바 일류양복점은 아니었지만 70년대 전속 재단사가 2명에 직원이 20여명이나 되었다. 많게는 하루에 양복 10벌씩 주문을 받기도 했다. 아무리 능숙한 기술자라도 하루에 양복 한 벌을 끝내지 못했고 보통은 이틀에 한 벌 꼴이었다. 바지만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
당시에는 양복을 월부로 해서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판원들이 관공서나 큰 회사에 들어 다니며 티켓을 팔러 다니기도 했으며 그들이 매월 수금을 다니면서 새로운 고객을 창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복점은 1980년 중반 대기업이 기성복 시장에 진출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든다. 직접 맞춰 입는 것이 아니라 체형에 맞춰 대량생산을 하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있고 옷을 맞추고 가봉을 해야 하는 불편함도 없었기 때문에 급속히 번져갔다. 그만큼 양복점은 더욱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하나씩 문을 닫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기성복이 커버할 수 없는 특수체형의 양복을 제작하거나 명장, 명인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기능인으로서의 명예를 갖고 이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광주에서 양복디자이너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이승은(정일라사, 1972년 개업, 충장로 4가) 신한수(삼영라사, 충장로 5가) 전병원(전병원양복점, 충장로 5가) 김양식(쾌남양복점, 남동) 등인데 이승은씨는 사단법인 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로 금익장을 받은 명인이고 신한수씨는 은익장을 수상한 바 있다. 또 전병원씨와 김양식씨는 사단법인 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가 주최하는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정일라사의 유병순씨는 이 지방에서는 최초로 한국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양장점 60·70년대 구법원통 장악

양장점은 양복점보다 10여년 늦게 생겼는데 초창기에는 양복점에서 함께 취급한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이후 독립하여 1960년대 충장로 일대와 구법원통을 장악했다. 양장점이 크게 번창한 것은 양재학원이 생겨나면서 많은 기술자들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광주지역에는 중앙양재학원, 뉴스타일양재학원, 노라노양재학원 등이 생겨나 수많은 디자이너와 재단사 등을 길러냈다.
광주 최초의 양장점은 이진모씨가 1955년 충장로 2가에 문을 연 모나미 양장점으로 초창기에는 주로 교복을 만들다가 양장을 주로 했다. 그 다음이 이철우씨가 운영한 남성양장점이다. 1957년 충장로 2가에 오픈했는데 1973년 후 서울로 진출 마담포라라는 전국브랜드로 성장하였다. 현재도 자녀들이 대를 이어가며 백화점까지 진출하는 등 크게 성공한 케이스다.

▲ 도투말(좌)과 드맹

57·8년께 중앙양장점(정은순)과 크로바의상실이 문을 열었다. 크로바의상실은 2년여 만에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이화양장점(윤옥희)이 오픈했으나 역시 2년여 밖에 운영하지 못했다. 테일러양장점(김병길)이 1959년 충장로 5가에 문을 열었다가 1960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 도미양장점(정옥순)에 넘겨주었고 그해 12월 미모사양장점(이화성)이 충장로 3가 가든백화점 자리에 오픈했다. 도미양장점은 1980년대 초 충장로 5가로 옮긴 도미패션하우스로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테일러양장점은 10여년 뒤 다시 삼화라사와 삼화양장점을 운영했던 박유성으로부터 삼화양장점을 인수해 5년여 운영했다.
1965년 수산나양장점(김정옥, 76)이 궁동 중앙로에 문을 열었고 인근에 로즈의상실(강을순) 대성양장점(박정희)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오픈했다. 수산나양장점은 2년 뒤엔 1967년 충장로 4가에 본수산나양장점을 오픈, 2개를 운영했다. 로즈의상실은 몇 년 후 충장로 3가로 이전, 충장로시대를 열었다.
60년대 후반 들어 키티 (오창주, 67년) 라모드(박순자) 롱비치(도투말 전신, 박재원, 69년) 노블양장점(한남례, 69년) 등이 문을 열었는데 도투말은 현재도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노미양장점이 같은 상호로 충장로 2가와 3가에 문을 열었으나 운영자는 각기 달랐다.
70년대로 넘어오면서 국제(임연자) 윤정의상실(박경옥. 작고) 등이 문을 열었고 70년대 후반 퀸의상실(유미경) 등이 생겨났다. 국제는 구법원통에 있다가 충장로 3가를 거쳐 20여년 전 현재의 위치인 충장로 4가로 옮겨 계속하고 있다.

1980년대의 대표주자는 김훈 컬렉션(김훈. 작고)과 심플라인(범영순) 등이다. 남성디자이너인 김훈은 옛 전남도청 옆 광산동에 새로운 샵을 오픈하면서 의욕적 활동을 폈으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뒤늦은 나이로 패션계에 입문한 범영순은 해외유학을 감행하는 등 부단한 노력으로 새로운 패션계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광주황금동에 ‘라베리따’란 브랜드로 샵을 오픈한데 이어 백화점에도 진출해 매장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초창기 패션계리더들은 인텔리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여고이상의 학력을 갖췄고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계에 뛰어든 선각자들도 있었다. 때문에 배우자들도 대학교수 또는 의사, 사업가, 공무원 등으로 당시 선망의 대상과 결혼한 사람이 많았다. 또 의상실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좋은 인적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는 직업의 하나였다.

▲ 1988년 광주신양파크호텔에서 열린 SS 코리안디자이너스 컬렉션 광주 패션쇼가 끝난뒤 기념 촬영했다. 앞줄 왼쪽부터 오점희 전 키티의상실 대표, 박재원 도투말 패션 대표, 조동림 도투말 패션, 정옥순 도미패션 대표, 임태수 국제복장학원 부원장, 맨 뒷줄 모델들 속에 고 김훈 컨렉션 대표 등이 보인다.

마담포라·도투말 서울로 진출 전국브랜드로
패션계리더 가운데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미모사, 남성양장점(마담포라), 도투말, 드맹, 변지유부티크, 도미패션하우스 등이다.
미모사양장점의 이화성 대표는 호남대학교를 설립, 패션디자이너 출신으로 지역의 젊은 인재 양성에 크게 공헌했다. 남성양장점의 이철우 대표는 마담포라라는 전국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도 마담포라와 스카라로하라 등 2개의 브랜드를 출시하고 있으며 자녀가 대를 이어 가며 백화점까지 진출하는 등 크게 성공한 케이스다.
도투말(대표 박재원)은 69년 구법원통에 롱비치의상실이란 이름을 문을 열었다가 남성의상실이 73년 화재와 함께 서울로 옮기자 그 자리에 도투말이란 이름으로 상호를 바꿔 충장로에 진출했다. 도투마리는 베를 짜기 위해 날실을 감아 놓은 틀을 일컫는 것으로 한국적 미학이 담긴 브랜드다.
디자이너 박재원씨는 1970년 대한양재협회 주관 전국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남편 조동림씨 역시 패션디자이너로 현재까지 예술적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박재원씨는 40여년을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아플리케, 플리츠 기법(주름장식)을 트레이드마크로 국제 패션계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수묵이나 화선지, 한지 등의 소재와 색감을 사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영혼이 있는 디자인’으로 평가받아 왔다.
박씨는 한국패션협회 초창기 멤버이자 광주 패션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한국 패션계의 원로다. 1995년 제 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패션페스티벌 위원장으로서 한국 최초로 ‘국제 미술 의상전’을 주관했다. 95년 패션지 ELLE 선정 제1회 패션인상, 96년 대한민국 ‘국민문화포상’을 수상했다.
광주에서 도투말 패션이라는 브랜드로 활동해오다 지난 2005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앞에 박재원부티크를 오픈, 전국적 브랜드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서울의 박재원 부티크는 매장 뿐 아니라 통유리, 벽걸이, 화이트 벽으로 구성된 갤러리 개념의 2층을 구성해 미술작품전시, 무용, 퍼포먼스 등을 공연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드맹의상실(문광자)은 1967년 YWCA 2층에 처음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고 10년 뒤 부티크를 새로 열었다. 1983년, 뉴욕 F.I.T. 하계 연수와 오사카 패션 박람회에 참가를 계기로 자연재료, 수공품들 같은 고급재료를 소재로 사용해 왔으며 천연염색 장인 한광석씨를 만나면서 무명옷에 대한 연구로 서양 복식스타일에 한국적인 분위기를 덧입힌 작품을 창조한 것이다. 1994년 청담동에 서울 본사를 설립하고 뉴욕과 일본에서 다수의 의상쇼를 개최하면서 국내 유명 패션디자이너 반열에 오르게 된다. 40여년 간 무명과 함께한 문씨는 한국섬유대상(패션디자인 부문) 모범 디자인상(산업자원부장관수여)을 수상했으며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상협찬을 맡기도 했다. 또 광주패션협회장 등을 맡아 지역 패션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한편, 문광자는 수산나양장점의 김정옥과 67년 광주YWCA에서 재활패션쇼(리폼)를 갖기도 하였다.

▲ 변지유 부티크(좌)와 도미 패션하우스

변지유의상실(1973)은 충장로 3가에 문을 열었다가 1996년 광산동으로 새 건물을 지어 옮기면서 변지유부티크로 이름을 바꿨다. 변지유는 샵을 오프한 뒤 뉴욕주립대학 패션스쿨, 밀라노 세꼴리 패션스쿨, 미릴라 아랑고니 예술학교를 졸업했으며 뉴욕 인터내셔널 푸레쇼, 독일 베를린 패션아트전, 중국 광동성 호은 국제패션쇼,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 서울컬렉션 등에 참가한 바 있다. 한국섬유신문사 섬유대상, 지식경제부장관상(디자인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도미패션하우스(정옥순)도 광주에서 수회의 패션쇼를 갖는 등 지역 패션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도미(都美)란 상호는 ‘도시를 아름답게 하자’는 철학이 담겨 있으며 중국에서도 패션쇼를 가진 바 있다. 최근에도 광주은행 본점에서 발표회를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으며 현재 딸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패션계는 대기업들이 기성복시장에 뛰어들어 위축된 데다 1980년 11월 금남로 지하상가 개설과 함께 중앙로가 확장되면서 충장로가 두동강이 나는 바람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중앙로 개통 이후 1983년 태산백화점이 충장로 파출소 부근 구 광주은행 본점자리에 건립돼 패션 브랜드 등을 입주시켰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생존해 있는 분들의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음호에 수정한 글을 게재할 계획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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