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等이란 대등한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부처님”

▲ 증심사 일주문

 무등산은 다양한 전통문화가 꽃을 피운 우리 문화의 산실이지만, 특히 불교문화의 전통이 천 년 넘게 이어져온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무등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식 이름이다. ‘무등(無等)’이란 말이 바로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불경에 의하면 ‘무등’(asama)은 대등한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불설십지경> 제1권 ; <유마경> 제14권). 무등산 정상의 천왕봉은 물론, 지왕봉과 인왕봉도 각각 비로봉과 반야봉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갖고 있다.

무등산이라는 이름은 언제 처음 붙여졌을까?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때 이미 무등산이라 불리었다. 어떤 이들은 이 이름을 후세의 표기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백제도 불교를 숭상했던 나라였던 만큼 산에 불교적인 이름을 붙인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고려사 악지>의 ‘삼국속악 백제’조에 ‘무등산가’라는 노래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 무등산을 ‘상서로운 돌이 있는 산’이라는 뜻의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부른 것처럼 불가에서는 무등산을 신성하게 여겨 무등산에 많은 절을 지었다. 또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에서 무등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려 왔는데 무등산의 절들은 이 제사에 당연히 참여했을 것이다.

증심사 쪽으로 무등산을 오르다 보면 신림교 옆에 큰 벼랑 같은 바위가 나온다. 예로부터 ‘나무아미타불암’ 또는 ‘관세음보살 바위’라 부르는 바위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바위에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한자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고경명의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 : 1574년)>에 의하면, 16세기 후반까지도 무등산에는 증각사, 입석암, 염불암, 상원등, 삼일암, 금탑사, 은적사, 석문사, 금석사, 서봉사 등 수많은 절들이 있었지만, 옛 절 중에 남아있는 절은 증심사, 약사사, 원효사, 규봉암 정도이다.

증심사(證心寺)는 무등산에서 가장 큰 절로 통일신라 때인 860년대에 철감 선사가 세운 절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세종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김방이 증심사를 중창했다는 사실이다. 김방은 당시 가뭄에 시달리던 광주에 경양방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불심도 깊어 증심사에 오백나한상을 모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제자 오백 나한을 모신 오백전은 증심사를 태워버린 정유재란과 6.25전쟁의 화마를 모두 면해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증심사에는 오백전과 오백나한상, 은은한 미소가 아름다운 철조비로자나불상과 석조보살입상,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진 특이한 칠층석탑 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무등산의 명소인 새인봉을 마주 보고 있는 약사사 또한 철감 선사가 세운 절로 원래는 ‘인왕사(人王寺)’였다고 한다. 1856년에 쓰여진 ‘약사전 중수기’에 약사여래 석불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석조여래좌상을 약사여래로 믿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절이름이 약사사로 바뀐 것 같다.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이 약사사를 찾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데, 이 불상은 약사사를 창건한 시기인 9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보물이다.

원효대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원효봉의 원효사는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봉을 마주하고 있다. 1847년에 쓰여진 ‘원효암 중건기’에 의하면, 원효사는 신라의 원효대사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이곳에 원효암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가 사실이라면 원효사와 의상봉(의상대, 의상굴)은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처일 것이다.

영조 때까지도 있었다는 원효대사 초상화가 6.25전쟁 때 원효사가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어 아쉽지만, 개산조당 벽화로 그려져 있는 원효대사의 일생이 눈길을 끈다. 원효사의 문화재 중에는 다람쥐와 비둘기, 두꺼비, 거북이 같은 동물이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조선 초기 동부도가 볼 만하고, 광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소 좋은 소조불상 머리들이 인상적이다.
원효사 주변에는 어사바위에 새겨진 ‘나무아미타불’ 위패에 얽힌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데, 어떤 스님이 원효사 부근 미륵암에서 나환자를 보살피다 잠시 멀리 탁발 나간 틈을 타 유생들이 나환자를 내쫓아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사람들이 생겼다. 탁발 나갔다 돌아온 스님은 그들의 가엾은 넋을 천도하여 극락왕생하게 하고자 어사바위에 그러한 위패를 새겼다고 한다.

무등산 일대의 스님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는 장불재를 넘어 고려말의 고승 지공화상의 전설이 어린 지공너덜을 지나면 규봉의 기암절벽 아래 유서 깊은 고찰 규봉암이 있다. 규봉암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도선국사 또는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규봉암은 예로부터 여러 고승들의 수도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과 관리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경치를 즐겼던 명소로서 여래, 미륵, 관음 등 삼존석이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찰도 고려 말에 왜구들의 침노를 당해 그들의 소굴이 되자 전라도 도순문사 이을진이 이끄는 결사대가 격전을 벌여 그들을 소탕했던 곳이고,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게 또 다시 화를 입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등산의 숨어있는 불교유적 중에 석불암과 보조석굴이 있는데, 지공너덜 윗길로 해서 규봉암 가는 길에 만나볼 수 있다. 석불암은 마애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전에는 그 자리에 ‘소림정사’가 있다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나옹선사의 스승이자 인도의 고승으로서 고려에 왔던 지공화상의 이름을 딴 지공너덜은 지공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할 때 법력으로 너덜의 수많은 돌을 어느 것 하나 덜걱거리지 않게 하였다고 하며, 또 그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어서 벌레나 뱀 처럼 기어다니는 짐승이 없고 낙엽이 가득한 가을에도 청소한 것처럼 깨끗하다는 전설이 있다.

보조석굴은 석불암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석굴로 보조국사가 참선 수행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석굴이라기보다는 지붕처럼 생긴 큰 바위 아래 약간의 돌과 흙으로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굴을 만든 수도처이다.
그 밖에도 원효사 가는 길에서 원효계곡 건너 윤필봉에는 신라 때 원효, 의상과 도반이었던 윤필 거사가 수도했다는 전설이 어린 천연 석굴인 윤필굴이 지금은 안양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무등산 들머리 등산로 옆에 있는 문빈정사는 비록 고찰은 아니지만 1980년대부터 불교계 민주화운동을 주도해온 절로 유명하다.

오랜 역사 속에 수많은 사찰과 스님들이 명멸했지만, 온갖 풍상에도 의연한 무등산과 더불어 빛고을을 지켜온 불교문화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무등산의 문화를 어찌 ‘시가문화’나 ‘가사문화’, ‘선비문화’나 ‘의재문화’로 국한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문화를 포함한 전라도의 풍요로운 전통문화와 민주·인권·평화 도시 광주의 진보적인 문화를 아우르며 무등산의 문화를 더욱 소중히 가꾸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정의행(광주불교교육원 이사, 사회적기업 스토리텔링사업단 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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