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시인,담양출신)

공명(共鳴)에 대하여

 시인 블레이크 말이 아니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도록 감동을 주는 데에 반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공연히 쓸데없이 갈 길을 방해하는 하나의 푸른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익히 알다시피 예전 시골 마을에서 동구 밖의 오랜 느티나무는 대개 당산나무로 지정되어 사람들에게 제사를 받거나 혹은 정자나무로 불리며 그 마을과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하나의 신목(神木)으로 섬김을 받으며 지상의 소원을 하늘에 올리고 하늘의 영을 지상에 내려주던 나무, 또한 그 그늘에서 삶의 휴식과 오락을 취하고 그 싱싱한 기운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게 하던 나무는 사실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은 그 나무라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과 교감을 이루며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나무를 대개 유용성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저 나무는 빼어난 관상용이고 이 나무는 아주 좋은 유실수(有實樹)라는 식의 인간중심적 사고로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 나무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교감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개발독재 시절에 당산제를 올리는 것을 미신이라고 여기고, 또 그 당산나무가 ‘새마을 길’을 넓히는데 장애가 된다 해서 전기톱으로 무자비하게 베어버린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도대체 사람이 사람 아닌 자연하고 어떻게 교감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다음의 북미 원주민 무당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욱 더 실소나 자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에게 자연과 자신의 직감과 교류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노인들은 그들을 숲 속으로 데려가 눈을 가리고 저마다 특정한 나무 옆에 앉게 했다.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눈을 가리고 여기 앉아 있어라. 이 나무를 껴안고 옆에 서보아라.” 그렇게 한나절이 지난 뒤에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다시 마을로 데려와 눈가리개를 풀어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네 나무를 찾아보아라.” 젊은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베어 하트의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지혜' 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젊은이들은 바로 자기들의 나무를 껴안고 있는 동안 나무와 어떤 종류의 것이건 교감이 가능했기에 곧바로 자신의 나무를 찾은 게 아니겠는가. 이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사람들도 다음에 옮기는「초록 聖火의 길」 이란 시를 한 편 정도는 읽고 고개를 돌려도 좋을 것 같다.

     『하늘에 닿을 듯 수려 찬란한 메타세콰이아. 저 나무를 커다란 초록 성화라 해도 괜찮겠다. 담양에서 순창까지의 시오릿길에 도열한, 저 초록 성화 천여 자루. 내가 너희로 인해 세상을 수긍할 때 나는 무엇을 본 셈일까. 초록 성화의 길 저곳으로, 싱싱 씽씽 은륜을 밟는 아이들의 꿈, 스치는 이팝꽃 향기. 아득했다 하자. 초록 성화의 길 저곳으로, 뒤뚱거리는 한 노부부의 어두운 귀, 저미는 까치집 소리. 따뜻했다 하자. 나는 한숨과 탄식의 길을 걸어왔다. 초록 성화의 저 길로 어느 비바람 치는 날 非非非 잎새 날릴 때, 터덜거리는 시골버스는 나보다 더 터덜거렸다. 터덜거리는 뒤끝이 별들의 푸른 밀어 쪽이라면, 그 푸른 전설들이 가지 끝마다 주저리주저리 열린다면, 저 나무가 한 겨울 큰 눈 뒤집어쓴들, 어느 나그네의 詩琴이 울려나지 않을 리 없겠지.
나는 때로 슬픈 것을 좋아한다. 저 나무에 걸리던 동박새와 소쩍새의 울음을 추억한다. 나는 또한 생생한 것을 좋아한다. 저 나무를 흔들던 쓰르라미와 씨르래기의 노래를 기억한다. 초록 성화의 길, 저 길이 급기야 불끈! 청청! 하느님에게까지 닿는 길이거늘 나는 이제 고요하여도 되는가. 하면 저 길이 길이거늘 저 길을 잘라내고 웬 길을 내려는가. 마을에선 왜 弔鐘을 울려대지 않는가. 너와 나는 뜨거운 팔짱 끼고, 저 초록 성화의 길 아득한 소실점 속으로, 어떤 씩씩한 사랑으로 차마 사라지는가. 오늘은 염천, 저 초록 성화는 저희들끼리 분기탱천, 더욱 타오른다면, 나는 또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소리칠까.』

  이 시는 내 고향 담양과 순창간 시오릿길에 도열한 1,000여 그루의 메타세콰이아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여 쓴 시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 등과 함께 고생대 아래 살아남은 몇 되지 않는 나무다. 이 나무는 내 고등학교 시절 예의 길 양 옆의 가로수로 심어져 한 40여년 자라는 동안 지금은 숫제 길을 아치 터널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장관이다. 많은 여행객들의 찬탄을 부르고 급기야 여러 영화 촬영의 명소까지 되어 있다. 그런데 한때 이 수려 찬란한 메타세콰이아 한쪽 오백여 그루를 베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차량 증가로 인한 도로 확장 때문에 불가피하게 나무가 잘려나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계획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나무들을 베어낼 때 실제로 베어지는 것은 오백 그루의 나무일지 모르지만, 그 나무와 함께 사라지는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준수하고 씩씩한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을 수긍하고 절망에서 벗어나던 일, 그 길을 싱싱 씽씽 자전거로 달리던 아이들의 꿈, 그 나무에 깃들이던 까치집과 소쩍새의 울음, 그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리던 별들과 연인들의 사랑과 나그네의 시심(詩心), 하늘까지 닿는 그 훤칠한 키로 인해 생기던 경건한 신심(信心) 등이 한꺼번에 베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 말이다. 어쩌면 그 나무의 길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 혹은 구원의 길일 수도 있을진대, 이런 길을 잘라내고 더 이상 무슨 길을 내겠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에서 자기가 사는 오두막집 뒷켠의 오래된 참나무가 개발업자들에게 쓰러져가자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로 “마을에선 왜 조종(弔鐘)을 울려대지 않는가!”라고 외쳐댔던 것처럼 나도 나무를 베는 일을 막지 않고서는 이제 세상에 대해서 그 무슨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중에 군민들의 강력한 벌목 반대 운동과 이에 대한 전국 네티즌들의 후원으로 나무들은 그대로 놔둔 채 다른 쪽으로 새 길을 뚫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울러 그 메타세콰이아 길은 담양의 관광명소로 조성되었고, 해마다 그 길에서 ‘가로수음악회’가 열린다. 올 세밑에는 그 가로수길을 걸으며 송구영신을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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