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지식인들의 열정이 꽃 피던 옥천사마소!
한국의 아테네에 비교될 지성의 전당, 옥천사마소!

옥천사마소 입구 골목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구읍 민가 가운데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선후기 사마시 출신의 젊은 유림들이 세운 옥천사마소(沃川司馬所)가 텅빈채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 200미터 이내 거리에 있으니 부담없이 방문해 보아도 좋은 곳이다.

옥천사마소 대문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57호인 옥천사마소는 본래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옥천이라는 이름이 행정명칭으로 바뀌어 지면서 옥천사마소로 훗날 불리게 된 것이다. 옥천을 옥주라고 부른 것은 고려 충선왕 5년인 1313년부터 조선 태종 13년인 1654년까지였다. 

옥천사마소 본체 정면모습

우암 송시열 선생의 『의창중수기(義倉重修記)』에 의하면, 효종 5년인 1654년에 의창 건물을 헐어서 세웠다고 하며, 현종 15년인 1674년과 고종 30년인 1893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본체는 정면 5칸에 옆면 2칸의 목조기와로 좌측부터 부엌, 온돌방 2칸, 마루 2칸을 두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그대로이다.

옥천사마소 뒷편 모습

지금은 인적이 거의 끊긴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지만, 16세기에는 청년 지식인들이 틈틈이 호롱불 아래 지성적 만남을 이어가던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은 2500년전, '바른 앎(알레테이아)'과 '덕스러운 삶(아레테)'에 목말라하던 청년들이 몰려 들었던 그리스의 아테네 광장에 비교될만한 지식의 향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젊은 유학자들이 틈틈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시국을 논하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옥천사마소는 훈구파들의 유향소 장악에 대한 반발로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들이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모임을 이어간 사상의 발전소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옥천지방의 소과 이상 급제자가 165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하니, 학문적 깊이가 있는 청년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진행된 지성발전소였음을 알 수 있다.

청년 유림들이 모여 시대를 논했던 안방

4차산업혁명기 대한민국에는 미래를 내다보며 가슴앓이하는 청년 지성인들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인간과 바이러스 간의 치열한 생존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시대에 인간다움과 웰빙 그리고 행복에 대해 토론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참 좋겠다. 옥천사마소처럼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고민하는 행복 서포터즈단과 행복도우미들을 각 지역에서 힘껏 육성하는 청년 행복 코디네이터 인재들의 모임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글 / 뉴스포털1 전국방송취재본부장 김용진 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국제웰빙대학교 총장, 행코기자단 단장,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동행취재 / 행복코디네이터총연합회 회장 김동호, 대한상공협의회 회장 박재완, 한국강사총연합회 사무총장 조옥성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