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기본 명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종교적 이기심은 도리어 사회악이 될 가능성 크다

대한민국은 특정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는 종교국가가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일 뿐이다. 그러한 까닭에 대한민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따른 종교의 자유가 용인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율성이 보장되는 까닭에 종교가 국가와 국민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각 종교들마다 국가와 국민에게 끼친 순기능도 많았다. 특히 국가가 도탄에 빠지고 민생이 어려운 환난기에 일부 종교나 신앙단체가 지친 사람들의 심리적 해방구로 각광받던 경우도 있었다. 1919년 대한독립운동을 주도했던 3.1만세운동의 선각자들 모두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렇게 여러 종교가 도탄에 빠진 국가를 살리기 위해 종교의 벽을 넘어 한 동포로서 서로가 연합하고 국민을 단결시켜 공동번영을 향해 함께 뛰던 아름다운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작년과 금년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작년에는 대구와 청도 등지에서 그리고 요즈음은 상주시 지역 주민들이 온통 난리를 겪고 있다. 특히 최근 물의가 되고 있는 어떤 선교단체와 인접한 화서면과 화남면 일대 주민들은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이다.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면 이단과 사이비 종파가 많이 등장하여 커다란 사회문제가 된 적이 종종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문명국가로 만든 것에는 기독교의 적극적이고 거대한 역할이 분명히 있다. 기독교의 전래도 대한민국 곳곳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고 그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선진국 도약의 기틀이 잡혀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끼친 선한 영향력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늘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오늘은 행복인문학적 관점에서 '그들만의 빗나간 도그마티즘(Dogmatism)'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우선 건강한 도그마로 지역과 국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다수의 기독교 단체들과 교회의 활동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아주 일부분이지만 도리어 세상의 아픔이 되고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사례들에 국한하여 행복 코디네이터의 관점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건전한 기독교의 건강한 사회 활동과 복음정신에 입각한 선교사역에 태클을 거는 것은 절대 아님을 먼저 밝힌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출현은 우리 사회의 분열만 아니라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공동체인 기독교의 분열도 초래하고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대한민국에 전파된 이후에 기독교는 가톨릭처럼 한 교단체제가 유지되지 못하고 꾸준히 수백개 이상의 총회로 분열되었다. 왜 이렇게 분화되었을까? 내 짧은 소견으로는 분열의 내면에 무엇보다도 이기적으로 변질된 도그마티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5100만 국민 모두가 하루 하루 코로나 바이러스와 힘겹게 사투를 벌이며 연명하고 있는 지금 절박한 이 순간에도 자기만의 방식이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도그마티즘이 사랑의 공동체인 기독교 정신을 더 파괴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 언론 뉴스를 통해 국민들은 더 긴장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 기존 코로나 19 바이러스보다 전염력이 훨씬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세계에서 3번째로 발견되어 확산 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 사정이 정말로 심각한 상황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단이든 사이비이든 정통이든 간에 기독교로 분류되는, 아주 일부분이지만 특정 단체나 교회들이 고집스럽게 밀접접촉 단체행사를 진행함으로 인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급속 확산되는 안타깝고 무책임한 비극이 대한민국 전체를 강타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독교 분파들 간의 비판과 정죄와 이단논쟁도 가열되고, 사랑의 공동체여야 할 기독교는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잘잘못을 따지고, 영적으로 무지하다고 정죄하며, 서로 다른 도그마를 가진 추종자들 간에 육두문자를 날리는 난타전도 이따끔 SNS에서 보여지고 있어 안타깝다.

물론 모임에 열심을 주장하는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일부분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들 대부분은 엄격히 거리두기 지침을 잘 준수하고 있고 예방수칙도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하여 일부 술집이나 카페 등에서는 이른 새벽부터 단체 술파티를 벌이기도 하며, 지하 곳곳에서 은밀하게 단체 모임이 불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공익적인 대중 시설에서는 거리두기가 잘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많기 때문에 왜 유독 우리에게만 적용하느냐는 설득력 높은 이의제기이다. 

정당하게 절차를 준수하면서 예배 모임을 갖는 건전한 교회나 기독교 단체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차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서 냉정함을 되찾아야 한다. 정부와 사회에게 강변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권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투사정신도 기독교의 출발점인 순교정신과는 너무 빗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투사를 만들지 않았고 투사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도 저항하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죄까지도 용서하는 배려심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이고 기본 정신이지 않을까?

기독교의 기본 명제는 자기들의 도그마나 신앙을 확산시켜 자기들의 교세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은 물량주의와 자본주의가 빚어낸 기독교의 오발탄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고 성전이지, 모여지는 공간으로서의 교회당은 건물로서의 가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기본 가치는 이웃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이다. 내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감 그리고 생명까지 나눔이 기본 가치이고 실천 목표이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삶이 기독교가 말하는 기본 도그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이웃의 아픔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집단이기주의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것은 참된 정신이 아니다. 참된 정통 기독교라고 한다면 어느 교단 소속이냐로 분류하기 보다 정말로 성경적인 가르침의 핵심을 준수하느냐로 분별해 볼 수 있다. 본래 기독교는 순교로 시작된 종교라는 출발점을 늘 잊으면 안된다.

순교의 정신은 자기의 도그마를 지키기 위해서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내 이익의 영역을 넓히거나 내가 살고자 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나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며 내 자신을 내 던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기독교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 버리면 자기만이 순교자의 정신을 가진 참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반사회적이거나 반정부적 행동을 감행할 개연성이 무척이나 높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도그마와 율법적인 삶에 빠져 자칭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수준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정죄했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되다 보면 중동에 그들만의 강력한 이슬람주의 국가를 구현하겠다며, 폭탄과 무기를 통해 무자비한 살해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감행하는 무시무시한 IS의 모습이 연상된다. 대한민국에서도 사이비 이단들의 행태는 물론 종종 보도된 바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1987년 32명이나 교주의 주도하에 음독자살한 오대양 사건, 1990년대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과격한 행동 등이 그러한 사례에 해당된다고 제시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연일 죽어나가고 있는 비상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공동체의 웰빙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 예수가 가르쳤던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안식일을 전후하여 열심히 회당으로 모이던 율법 준수가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기본 정신임을 각성시켰던 참된 도그마를 다시금 붙잡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기여한 공은 지대하다. 기독교만 아니라 타종교들도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들의 몸과 마음과 심지어 재산을 내어 놓아 구국의 일념을 불태웠고 애국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 외에도 독불장군 같이 자신들의 교리에 충성하는 맹신자들을 만들고, 교주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철옹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이상한 종교 단체들이 생겨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들은 추종자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기본 정신을 벗어난 일탈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독선에 빠지도록 꾸준히 세뇌시키는 학습과정이 있다. 교리공부를 빙자한 자신들의 일탈적인 사상을 주입시키는 학습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세계관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와 이단들이 등장하여 우리 사회에 엄청난 혼란과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도그마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보자. 영어로 도그마티즘은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직역한다. 도그마티즘은 독단적인 고집을 의미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태도에 대해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행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지칭한다. 특히 종교인이 도그마티즘에 빠지면 사회적 파장효과는 심각할 정도로 크다. 1990년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종말론'과 '휴거론'을 기억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삶 전체를 뒤흔들었던 이런 끔찍한 사건들도 근본에서 이탈한 자들이 만든 그릇된 도그마에 중독된 결과들이다. 

20세기 말에는 종말론에 심취한 사람들은 참 많았다. 그들 중 대학생은 멀쩡히 다니던 대학교도 자퇴하고 공무원은 조기 퇴직하고 주부는 가출하고 종말론자들의 모임 장소로 꾸역 꾸역 모여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하며 재림예수를 맞이하는 신부가 되겠다며 남들이 다 잠에 빠져드는 밤 12시에 박수를 치며 열광적으로 철야예배를 드리던 광신도 무리가 되어 갔다. PD수첩에서 몇 차례 그 심각성이 보도 되었듯이 그들은 재림과 휴거를 1천 퍼센트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처럼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전 세계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으며, 그것도 이미 20년 훨씬 이전의 추억의 헤프닝으로 가물거리고 있다. 비단 그 때만 아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이기에 꾸준히 이단과 사이비들의 도그마티즘에 세뇌되어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도그마를 기독교로 국한하여 생각해 보자. 2천년 전 라틴어로 도그마는 그리스어에서처럼 칙령, 법조문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교부시대가 되면서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옹호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 고백의 핵심 내용을 도그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도그마라는 용어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의신학'은 '도그마 신학'(Dogmatic Theology)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의 계시와 계시에 대한 해석은 늘 한결같을 수 없다. 신의 계시인 성경은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각자의 인생관과 세계관도 다르고 또 신앙적 체험이나 수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도그마가 '~ism'과 합해지는 도그마주의가 되기도 한다. 도그마에 대한 인간의 완전하지 않은 해석이 사회적 웰빙을 깨트릴 때 독선주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기독교에 유독 이단들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도그마가 갖는 계시적인 관점에서만 아니라 폭넓게 신의 계시가 실현되어야 하는 컨텍스트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과 포용적 태도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의해 발전되는 철학이나 인문학, 과학 등에서 바라보는 입장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순수한 보수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착각의 담을 아주 단단히 쌓아 놓고, 자기가 속한 컨텍스트인 이웃과 세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도그마티즘이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자칫 나의 이러한 주장은 '신본주의 신학이 아닌 타락한 인본주의 신학의 입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신앙도 이성적 사유 과정을 건너뛰다 보면 맹목적적인 신앙 즉 맹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변이 코로나가 창궐하고, 코로나 19로 1천명 이상 죽음을 당한 이 위기 상황에서 과연 내가 믿고 따르는 이러한 신앙적 가르침이 성경의 근본 진리에 합당한 가르침인가?"라는 의문을 갖고 자꾸 성찰하는 자세가 기독인에게 정말 필요하다.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내 이웃에 대한 배려심을 회복해야 할 위기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종교가 사회적 웰빙과 공동체적 웰빙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이미 건강한 교회들이 모범을 보이고 있듯이 코로나로 환난당한 이 시대에 서로 잘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배려심을 발휘하여 보자. 나만의 도그마티즘에 붙들려 바리새인이 되지 말고, 황금칠로 화려하게 건축된 회칠한 무덤같은 예루살렘 성전이 조만간 허물어질 것을 선포해야만 했던 청년 예수의 이웃 사랑정신의 근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글> 김용진 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국제웰빙대학교 총장,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뉴스포털1 전국방송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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