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시인,담양출신)

사랑의 비밀

 창밖은 모든 게 저무는 풍광이다.
붉고 노랗고 환하던 단풍은 금방 바스러질 듯한 갈색으로 죄다 변하고 그나마 남은 잎들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토록 이글거렸던 지난여름도 이 늦가을의 풍상(風霜)을 맞아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 몇 장 정도로 휙 날려버렸다.

이제 우리들의 고향에선 모든 곡식의 추수를 마치고, 보리씨를 뿌리고, 김장을 담그는 것으로 한 해 일을 갈무리 하리라. 많건 적건 그 수확으로 자족하며 이제 먼 능선 위로 기러기가 날아오는 걸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저무는 풍광 속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지나친 욕망 때문에 큰 실패를 한 사람이거나, 힘써 일했으나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쥐꼬리만 한 수확도 거두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지금 남몰래 쓸쓸하고 무언가 조급하기도 하겠다.

사실 누구나 이때쯤이면 모래알 좌르르 빠져나간 뒤의 빈손마냥 거둔 것보단 잃은 것 투성이인 삶 때문에, 주막집 한켠에서 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다 잠든 밤, 부엌 식탁에서 쓴 커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실과 고독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의 따뜻한 호명(呼名)을 기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이런 늦가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존재의 순수에 가닿는 사랑, 그런 사랑을 꿈꾼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비밀」이란 나의 시 한 편을 선사한다. 
   
  신의 전언(傳言)인 양 반짝이던 잎새들이
  마지막 것까지 져버린 저녁이다.
  이제 뜨락 가득 어둠이 내리고, 마음은
  애기 업고 동구에 나간 노인네처럼 서성거린다.
  이제 집이 없는 자들은 사랑 밖에 없나니
  먼 데서 오지 않는 세상을 기다리지 말고
  잠들지 말 것, 잠들면 두 연인은 다른 꿈을 꾸지;
  말하지 말 것, 말하면 엿듣는 자가 나타나지;
  보지 말 것, 빛은 어둠을 갈라 결합을 떼어놓지;
  소리 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하듯
  한밤중 손가락들로 더듬어 찾는 사랑만이
  영혼의 탄성을 발하고, 그것만이
  하나 둘, 신의 음률 속에 별로 튀긴다는군.
  시방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일랑은
  이제 소슬하고 차가운 인동의 광휘일 뿐,
  저무는 풍광의 뱃속으로 몰래 들어가
  그 속에 내연(內燃)하는 잉걸불을 일굴 것.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는 “연애와 열정과 시(詩)만 있다면 자살에 이르지 않은 길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실과 고독이란 존재와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적어 본 시이다.

올 한해 밖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면 이제 한번 존재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보라. 말하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잠들지도 말고, 그 속에 내연하는 잉걸불을 일구시라.
마치 장님들이 소리 나지 않는 점자음보를 연주하듯, 한밤중 손가락들로만 사랑을 더듬어 찾는다면, 그것이 언뜻언뜻 스치는 소리까지 우주율로 반응하고, 눈앞엔 찬란한 별들이 싸륵싸륵 피어날 것이다. 그 황홀한 관능이 성스런 영혼의 탄성으로 바뀌는, 이런 아주 은밀한 생을 꿈꾸면 얼마나 좋을까.    
 
 『연애론』을 쓴 스탕달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리 같은 결정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비유했다. 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소금광산을 방문한 사람들은 잎이 다 떨어진 겨울의 나뭇가지들을 깊은 굴속으로 던지곤 한다. 두어 달 후에 그 나뭇가지들을 꺼내보면 그것들이 반짝이는 소금 결정체들로 덮여있는 것을 보게된다”고 썼다.
 

비록 그 수정 같은 결정체는 부서지기 쉽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처럼 항상 자기가 꿈꾸는 어떤 사랑의 이상형을 만들어낸다.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든 이상형을 만날 때마다 소금꽃 결정체 같은 것을 형성하는 작업을 자기도 몰래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이 쉽게 부서질지라도 사랑의 합일을 꿈꾸는 것은 허망한 짓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셈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얘기 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라캉의 논리를 받아 이종영은 『사랑에서 악으로』라는 책에서 “각각의 주체는 아주 작은 창문이 달린 단자(單子)적 존재여서 서로의 내면을 환히 들여다볼 수 없다”고 하며 사랑의 근원적인 확인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의 상태는 상대에 대한 ‘이상화’ 과정을 동반하는데, 이 이상화라는 것은 일종의 비현실적 환상이어서 결국에는 깨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의 감정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불안이 생길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결국 불안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다른 잠재적 경쟁자를 제압해 사랑을 독점하려는 욕망을 낳는다. 그리고 “이 욕망은 강제로라도 사랑과 인정을 얻으려는 지배 욕망이며, 이 지배 욕망은 지배를 가능케 하는 권력 욕망을 낳는다”고 까지 몰아가는 이종영의 논리가 물론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논리 이전에 지금 연인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감싸 안거나 연인의 보드라운 귓불을 만지작거려 주는 것이다.

“달은 깊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 사랑은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또 누구처럼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하는 법이다”라고 초를 더 세게 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넘침이 모자람만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바람이 나뭇잎을 한번 살짝 살랑이다가 스쳐버리는 것 같은 사랑일지라도 우리는 오늘밤 사랑하는 사람의 둥그런 어깨 위에 손을 얹자. 연인의 둥그런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손은 곧 우주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존재 자체는 나뭇잎 하나처럼 허망한 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뭇잎은 힘이 다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떤 여리디 여린 바람에도 한없이 흔들리고 떨리며 반응을 한다. 사랑이 곧 존재이유라는 것을 바람 앞의 나뭇잎처럼 명백히 증거하는 것도 세상엔 별로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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