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갈등을 넘어 설득과 소통으로 더 나은 행복을!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가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유?

김용진 행복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신직업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신직장 'DNA힐링센터' 전국 1천곳 개설 진행자

뉴스포털1 전국방송취재본부장

 

미국 대선결과를 놓고 민주주의 대표국가로 간주되던 미국사회가 심각하게 양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립은 상호파괴적인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흔적도 없이 미국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도 한 번 붙잡아 가두었을 정도로 위력을 떨치며 말이다.

미국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침몰 직전의 위기 상황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코로나의 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국민 모두가 입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고, 열강을 하다 보면 마스크가 턱스크가 되기도 하여 신경이 너무 쓰인다. 그럼에도 마스크 하나에 의지하며 하루 하루를 위태롭게 버텨야 하는 불편하고 불행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정치적 갈등도 미국 사회에 못지 않은 불행한 상황이다.

로마의 바티칸에서 감명깊게 응시했던 라파엘로의 철학 명화인 '아테네 학당'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한다.

라파엘로의 대작, '아테네 학당'

바티칸은 종교를 떠나 로마 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필수 방문지로 손꼽는 관광명소이다. 교황이 집전하는 집무실 창문이 보이는 광장에도 갈 수 있지만, 그 보다도 시스티나 예배당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 벽화'와 '천지창조', 그리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학당 The School of Athens’은 500년 전에 회벽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이다. 한국의 사찰에 그려진 대부분의 벽화도 프레스코이다.

아테네 학당의 철학적 배경인 시대상황은 이러하다. 지금부터 2400여년 전 현실의 부정의함을 비판하며 자꾸만 '저 곳'을 이야기하는 위대한 선각자 소크라테스를 처형해 버림으로서 아테네는 사상적 정치적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대립과 갈등은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시대 이후에도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그 배경에서 라파엘로의 그림을 이해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라파엘로는 그림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예술과 지혜의 신인 아폴론을 등장시켰다. 아테나 신전의 대리석 조각상도 배경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아테나 신전 정 중앙에 두 사람이 서서 논쟁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신은 침묵하기만 하고 사람들만 각자의 사상에 따라 논쟁을 펼쳐 나간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들이 플라톤과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들 주변에는 모두 50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사색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묘사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라파엘로가 참 잘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여러 저서 중에서 인간과 우주론을 담고 있는 '티마이오스'를 자랑스럽게 왼쪽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은 하늘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말하고자 했던 이데아의 세상인 '저 곳'을 가르치는 것이다. 플라톤의 관심사는 현실이 아닌 초월된 이데아계였음을 라파엘로가 묘사한 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왼쪽 무릎으로 받쳐 들고 오른손 손바닥을 땅바닥을 가르치며 '이 곳'이 중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현실에서 잘 살아가는 지혜와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초월주의와 이상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를 강조한 것을 라파엘로가 묘사한 것이다. 인생만사가 초월론이냐 현실론이냐의 근본적인 시각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까?

여기에서 우리의 눈을 2020년대 대한민국으로 옮겨 보자. 어제도 광화문은 시끄러웠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붉은 깃발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비난과 조롱과 겁박과 야유섞인 함성으로 서로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는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함성만 외치는 확성기 소리가 건강한 소리가 아닌 소음공해가 되어 우리의 귀를 아프게 하고 있다. 

지금부터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도 늘 시끄러웠다.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이익만을 외치는 괘변론자들도 있었고, 바른 사유를 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결국 그들 대다수는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처형하는 무지한 결정을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리고 역사는 흘렀고 훗날 두고 두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집단 행동을 반성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양분화된 상황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 곳'이냐 '이 곳'이냐, '저 것'이냐 '이 것' 이냐의 다툼에서 기인한다. 어쩌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이 대한민국에서도 극단적 좌우 대립으로 연장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한민국이 큰 궁지에 빠진 현 싯점에서 논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논쟁은 언제나 필요하다. 보다 더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나 예수 같은 선구자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고 반면교사가 되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앞으로는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말하겠다"고 서약하고서야 풀려나오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니까"를 중얼거리며 비틀거리던 갈릴레오 같은 사람들도 시대를 바꾸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50년전 노동현장의 참혹한 현실을 분신을 통해 고발했던 전태일 열사가 그 당시에는 어리석은 청년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독재정권에 의해 비난 받기도 했지만, 문민정부가 된 이제는 시대를 앞선 선구자로 대통령이 나서서 추앙하는 것처럼 시대가 바뀌면 해석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생사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다툼과 주장만 있고 설득과 포용이 없다. 가장 큰 불행은 타툼의 현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포용의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불행의 늪으로 빠져 들게 하지 않으려면 다툼과 논쟁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기술이 절대 필요하다. 이러한 기술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한다. 특히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덕목이다. 그대 그리스에서는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수사학이나 변론술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정작 국민행복강사로서 나도 이러한 탁월한 설득 기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늘 고민한다. 또한 행복 코디네이터 프로그램은 그러한 정치적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소박하게 날마다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작은 소소한 행복으로 연결시키는 소확행의 처세술을 전수하는 라이프 코칭 정도에 불과함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비효과'처럼 작은 움직임의 효과를 나는 확신한다.

정부의 지원 한 푼 없이 내가 사재를 털어 20년간 유지하고 있는 국제웰빙전문가협회를 통해 전국에 확산시키고자 하는 행복 프로그램도 어찌 보면 통합과 포용의 설득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복학교, 행복충전소, 행복방송국, DNA힐링센터 등도 육체적 웰빙과 비육체적 웰빙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시키는 장소이고 방법이다.

이러한 행복 프로그램들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전수했던 아테네학당, 플라톤이 자신의 이원론과 초월론인 이데아사상을 전수했던 아카데메이아,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이 비현실적임을 지적하며 현실과의 타협과 포용을 지혜롭게 해 보자는 사상을 전수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의 거룩한(?) 운동처럼 말이다.

오늘 밤 나는 캄캄한 밤을 헤치며 완도로 차를 몰고 간다. 그리고 내 이동사무실인 캠핑카를 화물선에 올려 깊은 밤 제주도로 향한다. 나를 실은 화물선은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게하며 밤 새 달릴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고 이른 새벽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제주에서도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육성세미나와 직무교육이 연속된다.

나를 태운 세상은 이렇게 흐른다. 시간이 흐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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