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다산과 同하다―

다산초당

다산학당(소장 김창수, 학장 이창기) 목민반 5기생(회장 이용운) 30여 명은 10월 31일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 선생 유배지를 답사하며 현장학습을 했다.

이날 현장학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 사의재, 다산초당 천일각, 백련사, 주막 등 다산선생의 유배지를 둘러보고 5기 회원간 화합도 다지며 이용운 회장의 선임식도 겸했다.

 

다산초당 입구
대흥사 대웅전
윤동환 전 강진군수의 다산선생 설명

다산초당에서는 전 강진군수이자 현 (사)다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윤동환 이사장으로부터 다산의 생애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김창수 소장

김창수 다산학당 소장은 설립취지에 대해 “공직자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 등에 나타난 다산의 공직자관과 리더십 청학을 통해 선출직 및 공직자들의 공정성과 청렴정신을 함양하고 다산의 경세치용, 실사구시 정신과 애민 민본사상을 이해함으로써 미래지향적 비전 제시와 공직자로 서의 동기부여, 르네상스적 인간형인 다산 정약용의 주요저작에 나타난 경학, 철학, 법학, 과학, 문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이해함으로써 인문학적 소양증진, 다산학당 운영을 통한 민·관·학의 평생학습적 거버넌스 구축으로 지역사회의 사회적 신뢰망 확충을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창기 학장

이창기 학장은 “우리는 다산선생의 지혜를 빌어 대전에 건강한 담론을 생산하는 학습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대전은 조선조중기에 활동했던 권시, 송준길, 송시열 선생 등을 배양한 정치사상의 중심지였다. 대전의 선조들이 쌓아온 학문적 사상을 바탕으로 다산의 실천성을 접목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웃은 물론 대전지역의 새 변화를 이끄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 다산 정약용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신유사옥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초기 생애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묶기도 했는데, ‘삼미’라는 아호는 어렸을 때 걸렸던 천연두의 흔적 때문에 눈썹이 세 개처럼 보여서 붙인 것이다. 다산은 뒤에 천연두와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대한 치료에 관심이 많아, 홍역 치료에 대한 책인 <마과회통(麻科會通)>과 종두법에 대한 책인 <종두심법요지(種痘深法要旨)>를 쓰기도 했다. 그는 1776년에 혼인하여 6남 3녀를 얻었다.

다산은 매형인 이승훈(李承薰)과 가까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었다. 다산은 이승훈과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李家煥) 등과 교류하면서 실학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성호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

다산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 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당파싸움에 밀려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지방의 관리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복귀하여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지방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유배생활 시기

다산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당파싸움은 계속되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지방 정치의 부패와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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