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 두 편

벌써 가을이 깊어 갑니다. 여름의 물 폭탄과 태풍으로 수확이 예년에 비해 30%가량이 줄었느니 절반 이상이 줄었느니 하며 야단입니다. 곳곳에 수해로 입은 상처들은 아직 복구되지도 않았는데 곧 겨울이 닥치겠군요. 이런 날은 무언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때인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맑은 가을의 시 두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이시영, 「자존(自尊)」

세계 각지의 우주목(宇宙木)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나무의 정령들의 속삭임을 다시 들려주는 자크브로스의 『나무의 신화』에서 옮깁니다.
“나무는 사실상 전 우주적 몽상의 가장 적합한 기반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무는 인간의 의식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이요, 우주에 생기를 부여하는 생명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무 앞에서 인간은 꿈을 꾼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면 인간은 나무에 동화되어 그 내적인 움직임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시영의 「자존」이란 시에서 우리는 이런 나무 한 그루를 확연하게 보게 됩니다.
"화창한 가을날", 그러니까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지는 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 나무는 치명적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황금빛의 은행나무라 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라 해도 좋은데, 가을날의 투명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몽땅 받고 있어 밝고 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뚝, 마치 우주목이자 세계수(世界樹)인 양 솟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을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입니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 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입니다. 은행나무는 지구가 생성된 이래로 지금껏 살아온 몇 안 되는 나무종 중의 하나이고, 느티나무는 예전 같으면 마을마다 그걸 당산나무로 지정하여 제사를 올리던 나무가 아니던가요. 어쨌든 그 나무는 참으로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밝고 환할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고 합니다. 객관적으론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는 말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의 주관적 관점은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입니다. 사실과는 어긋나지만 한마디로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습니까? 새는 자유, 순수, 평화 등을 상징합니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에 대한 꿈의 상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밝고 환한 나무에서 모든 새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첨언하면 그 나무가 키가 위로 큰 은행나무라면 새는 옆으로 날아야 하고 수형이 옆으로 둥근 느티나무라면 새는 위로 솟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거나, 새의 수직과 나무의 수평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조화는 십자가(十)와 같은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크브로스 말처럼 우주에 생기를 부여하는 생명의 통로인 나무는 모든 자유와 평화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지하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미친 삶의 영성을 늘 깨닫게 하는 우주적 몽상의 길이기도 하지요.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 황인숙, 「자명한 산책」

삶이 쓸쓸하고 비루하고 덧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래도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황인숙은 그간 여러 시집에서 삶의 자조와 회한과 비아냥거림의 이미지에 몰두하지만, 그 어조는 텅 빈 대낮 눈물 나게 하는 햇빛처럼 명랑하기도 합니다. 절망과 어둠과 슬픔이 덮쳐 와도 스폰지처럼 충격을 흡수해서 종당엔 테니스공처럼 싱그러운 말들을 마구 퉁겨냅니다. 무거운 탄식과 안타까움과 자기모멸이 자유로움, 발랄함, 가벼움 등의 옷을 입습니다. 어쩌면 너무도 침울하고 쓸쓸하고 비루한 삶을 이겨내려는 그 안간힘의 명랑함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시들을 써 왔습니다.
「자명한 산책」은 너무도 ‘자명한 산책’에 대한 반발입니다. 자명한 산책이란 무엇인가요? 보도블록 위의 산책입니다. 원래 산책이란 들길이나 숲길을 이리저리 거니는 것입니다. 그 숲 속의 산책은 독뱀에 물릴 수도 있고 허방에 빠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숲 속의 산책은 전혀 알 수 없는 아우라에 쌓여 있다는 뜻도 되어 설렘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숲 속의 산책은 만물과 교감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의 기와 우주의 기가 싱그러운 합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도블록 위의 산책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 위에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이 덮여 있더라도 그 밑은 역시 단단한 보도블록일 뿐입니다. 조심히 딛어야 할 발도, 기대로 설렐 가슴도 없습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명징한 세계는 근대적 기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세계가 인간에게 편리와 문명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발로 퍽! 퍽! 걷어차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한 이유가 뭔가요? 삼갈 것도 설렐 것도 없는 세계야 말로 권태롭고 환멸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쓸쓸하고 비루하고 덧없는 세계를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미지(未知)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지요.  자명한 산책은 설렘과 교감과 미래가 없는 아스팔트 위의 산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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