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인 김성권 님의 "나는 담양 고추아빠"

나는 유튜브에서 담양고추아빠로 활동 중이다. 조회 수가 많을 때는 십만을 넘기기도 했다. 농사에, 그것도 고추 농사에 이렇게 조회 수가 많은 걸 보고 놀란 적도 있었다. 양념이나, 음식에 고추가 많이 들어가니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대표 식품이라 할 수 있는 김치에는 고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재료다. 비록 김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중점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건고추’다. 야채는 흐르는 물에 씻어 먹고, 과일은 껍질을 벗기거나 깎아 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야채나 과일에 약을 치는 건 부담이 작을 것이다. 하지만 건고추는 껍질 째 사용한다. 그러니 그만큼 신경 써서 재배해야 하는 작목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나는 친환경으로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말이 친환경이지, 친환경농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다. 은행이나 쇠비름 등으로 친환경 비료를 직접 만들다 보니 농장에 역겨운 냄새가 나기도 한다. 나는 냄새에 익숙해졌지만 냄새 때문에 농장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신다. 그렇다 해도 나는 친환경 농법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간혹 있는데 나를 믿고 멀리 해외에서 주문하는 고객들을 생각하면 기운이 저절로 생겼다.
유튜브에서 보았다며 미국, 유럽, 동남아에 진출해 계시는 동포들이 주문했다. 수익이나 양을 떠나 나에게 커다란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농장을 견학하고자 하는 예비 귀농인이나, 고추 농가, 단체들의 문의 전화가 자주 온다. 유인 작업, 액비 만드는 방법, 튼튼한 지주 세우기, 토양기반 조성과 터널 안의 유인줄 설치, 액비와 미생물을 동시에 관주하는 방법 등을 알고자 하는 분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은 탓에 친환경 농법을 포기할 수 없다.

김성권 귀농인의 고추밭
김성권 귀농인의 고추밭

내가 고추를 재배하고, 담양고추아빠로 알려지기 전에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통영에서 조선소에 다녔다.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취미생활을 위해 작은 배까지 구입해 통발로 장어를 잡았다. 정어리를 미끼로 장어를 잡는 재미가 쏠쏠했다. 봉사가 문고리 잡는 격이랄까. 어떤 날은 기존 어부보다 더 조과가 좋을 때도 있었다. 현지인보다 장어 포인트를 잘 알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운 좋게 포인트 선정을 잘했거나, 싱싱한 미끼를 풍족하게 넣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잡아온 장어를 이웃과 동료들, 지인들과 나눠 먹었다.
  장어를 자주 먹었기 때문일까.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쌍둥이를 낳았다. 큰 녀석이 아들인데, 쌍둥이를 낳았으니 세 아들의 아빠가 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고추아빠의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흔히 고추로 통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아내와 세 아들과 오순도순 살았다.

그런데 조선업계가 점차 깊은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하루 걸러 하루 쉬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호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선 기술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기술력보다 가격을 우선시하는 발주처들이 중국으로 몰린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출신들은 현재가 암울하면 가장 먼저 농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농사를 떠올렸다. 고향이 농촌이라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생각했다. 농사에 대한 거부감도 약했다.

아내와 함께 짓는 고추농사
아내와 함께 짓는 고추농사

아내에게 귀농하자고 하니, 흔쾌히 동의했다. 조선업의 불황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아내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애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귀농을 결심했으니 미루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배를 처분하고, 담양으로 터전을 옮겼다. 무슨 작목을 재배할지 고민을 했는데, 그 고민의 기준은 최소의 비용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요즘은 농사라기보다 농업이라고 해야 적확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투자가 만만치 않다. 간단하게 비닐하우스를 지어도 기천만원은 훌쩍 들어간다. 투자를 해야 소득이 높겠지만, 투자 후 농사를 망치면 다음 해까지 소득이 없으니 투자가 주저되었다. 농사를 몇 년 간 지었다면 모를까, 유년시절의 미약한 경험을 믿고 덜컥 투자하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으로 선정한 작목이 고추였다.
 
고추는 오직 사람의 노동력으로 수확해야 하기에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었다. 아내도 챙이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천으로 얼굴을 친친 가린 채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모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터졌다. 애들도 그런 마음일까. 애들이 틈만 나면 고추밭으로 나와 일손을 거들었다. 서툰 일손이지만 녀석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몰랐다. 육체노동에서 느끼는 고단함도 줄었지만, 정신적으로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우리 네 식구가 고추 밭에서 조단조단 이야기 나누며 일하는 게 좋았다. 내가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유튜브에도 그런 표정이 은연중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내가 찡그리고 있다면 아마 그런 조회 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일도, 모래도, 담양고추아빠라는 닉네임에 자부심을 느끼며, 닉네임에 걸맞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강성오 군민기자

※ 1974년생 김성권 귀농인은 2017년 담양군 대덕면 외문길 48-16번지로 귀농했다
  (연락처 010-8621-9899)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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