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코디네이터가 말하는 그레잇 코리아는 어떤 것인가?
국민행복강사 김용진 교수의 행복 코디네이터 운동이 찻잔속의 태풍일까?

김용진 교수

김용진 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장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뉴스포털1 전국방송취재본부장

 

전국에서 독감백신 접종후 사망하는 사고가 연일 증가하고 있다. 국민은 불안해 하고 있고 이러한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국민행복지수는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어제 밤에는 줌을 통해 2년뒤 퇴직후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가 되려고 준비중인 현직 신학대학교 모교수에게 행복 코디네이터 정책과 비전에 대한 정보를 안내하였다. 신학자가 생각하는 행복과 행복 코디네이터인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관점의 작은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17년 전에 신학대 기독교윤리학교수로 재직했기에 소통에 충분한 공통점이 많았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논의는 신약학을 전공한 신학대 교수와 고대 그리스철학을 전공한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와의 잔잔한 대화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 19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내가 대한민국의 정치나 경제상황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체감하는 행복감과 관련하여 생각좀 해 보자는 것이다.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당신!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어떤 대답을 할까?

행복은 현실에서 행복과 동떨어진 상황에 많이 처해 있는 사람에게 간절한 염원이 된다. 행복이라는 질문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최고의 염원이다. 그래서 인류는 애시당초 철학적 사유를 진행하면서 행복에 대한 고뇌와 토론의 시간을 확장시켜 왔다.

사실 행복을 그리스어 '유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ía])라는 단어와 연관지어 처음 언급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아들의 이름으로 저술한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유다이모니아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다이모니아와 관련된 논의를 구구절절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한 토론 과정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자세히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두툼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서를 비록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행복에 대한 우리 각자의 열망은 식지 않는다. 그만큼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심이 누구에게나 밑바탕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개념화 한 유다이모니아를 오늘날 우리가 행복이라는 단어 그대로 이해 하여도 될까? 1900년 철학자 버넷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다이모니아를 행복(happiness)라는 용어로 번역한 이후, 학자들은 비판없이 유다이모니아를 행복이라고 번역해 왔다. 그러다 보니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이 곧 행복'이라고 말했다고 착각하는 목적론적 설명으로도 오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어로 개념화한 유다이모니아를 행복(happiness)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것 보다는 선이나 좋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착한 정신이라는 관점에서 행복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래서 로스는 유다이모니아를 잘 사는 것(well-being)으로, 쿠퍼는 번영(flourishing)으로 번역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논의는 여기에선 이쯤 하기로 하자.

즐거움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적이고 일시적인 즐거움과 달리, 인간적이고 영속적인 즐거움이 인간만의 특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영혼이 추구하는 많은 덕스러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영혼을 언급한 까닭은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이데아이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에이도스이든 상관없이 영혼은 신적인 것과 상당히 가까운 존재이다. 곧 행복을 신적인 것과 연관시켜 말하고자 한 것임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행복한 사람은? 고도의 명상과 성찰로 진행되는 지적이든, 아니면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윤리적이든 상관없이, 고상하고 품격있는 신적 영역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한다는 의미는 사유와 윤리적 행동이 절제, 용기, 관용, 정의 등의 덕스러움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행복이란 것이 신적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서 인간에게는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희망은 절망으로 변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행복한 사람, 행복한 삶은 현실적이다. 2300여년 전, 알렉산더대왕이 통치하던 고대 그리스와 마게도니아에서 자신이 가정교사로 가르쳤던 알렉산더 대왕의 막강한 지원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귀족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인생을 3대 유형으로 설명했다. 향락을 즐기는 쾌락주의자, 명예심에 살아가는 정치인의 삶, 그리고 참된 인생과 관련된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이게 참 중요한 의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행복감을 쾌락이나 부요함이나 권력과 관련지어 생각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것만 아니라 덕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유의 고상한 전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당시 상류층의 쾌락적이고 명예지향적인 삶과는 다른 사유하는 철학자의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을 최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당시 상류층의 이단아로 정죄받기에 충분한 괴짜의 길을 선택했지만, 진리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철학자의 삶이 참 행복한 삶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당시 상류층의 상식을 깨트리고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데 고집을 피운 것은 그도 행복국가를 만들어 가고 싶은 현실적 소망이 강했던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조부격인 소크라테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사형, 그리고 그 억울한 사형과 관련된 정치인들의 부정의한 함을 아버지격인 스승 플라톤의 입을 통해 들었을 아리스토텔레스! 그러한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조리하고 불행한 점이 충만한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행복을 그만큼 갈급해 했던 까닭에 유다이모니아를 자꾸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행복은 착하고 훌륭한 행동의 결과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품격있는 생각! 나는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로서 그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고민하고 힘쓰는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에는 참 많이 필요하다. 나는 그들도 나의 동지인 행복 코디네이터라고 생각한다. 비록 나에게서 행복 코디네이터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세네카가 쓴 행복론 또는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단순한 즐거움은 행복의 첫째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건강한 영혼이나 정신이 행복의 첫째 조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정신으로 재산, 명예, 즐거움 등을 지배하라는 세네카의 주장은, 코로나로 뭐든지 잘 안되는 까닭에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의 가난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주장이 아닐수 없다. 그렇다. 건강한 마음과 정서가 가장 큰 재산이고 행복의 조건이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집요하고도 갑작스로운 공격 앞에서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되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코로나 백신을 개발해서 빨리 접종하는 일일까? 아니다. 육체는 치료나 예방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더 센 변종 바이러스가 기세등등하게 등장하여 인류를 전멸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앞으로 과학의 힘을 의존하는 현대인류의 멸망은 기아나 홍수같은 자연재난이 아니라, 사스나 코로나19 같은 호흡기 유행병이 주원인이 될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행복학자들의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영원하고 참되고 완전한 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정신능력이 우리에게 절대 필요하다. 스마트홈이니 스마트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점차 사유능력이 퇴화하고 단순 기계적 인간으로 전락하는 우리네 삶을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운동이 절대 필요하다.

인간다움은 '감사-존중-나눔'의 실천에서 생기를 얻는다. '그 사람 참 인간답다'는 말은 '감사-존중-나눔'의 정도에서 평가되는 말이다. 바로 그 일을 행복 코디네이터 운동이라고 나는 부른다. 그리고 행복 코디네이터 운동은 그 사람의 마음과 정서와 정신을 건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그것이 확산되어 공동체의 웰빙, 국가행복까지로 이어지게 된다.

행복은 머리에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심장소리를 들으며 뛰다가 손발과 입술로 발현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그러한 실천이 역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순발력있게 발현될 때 주어지는 상급이다. 코로나로 무너져 가는 것은 경제와 정치나 사회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기억하자. 나의 정서, 정신,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하는 행복 코디네이터 3대 운동인 행복비타민을 많이 활용해 보자. 내가 행복 파파게노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리하다 보면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는 이 일의 확산을 위해 행복 코디네이터 책임교수 1천명! 행복 코디네이터 인턴 10만명 육성을 위해 오늘은 걷고 내일은 뛰고 모레는 날아갈 것이다. 나와 함께 행복한 세상을 갈망하는 행복 코디네이터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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