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인 오믿음 님의 '한우를 반려자처럼'

귀농인 오믿음 님
귀농인 오믿음 님

나는 어려서부터 소와 친숙했다.
아니, 소고기에 친숙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소고기 도매업을 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양산동 삼호축산 내에서 사업장을 운영했다. 집에 오실 때는 국거리나 구이용으로 소고기를 가져오곤 했으니 자연스럽게 소고기에 익숙하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뼈도 가지고 오셨다. 곰국을 한 솥단지 끓여 놓고는 매 끼니마다 곰국을 내주실 때면 투정도 부렸다. 맨 날 같은 거냐고. 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매일 먹으면 물리기 마련인데, 어린 나이에 곰국의 진정한 맛은 느낄 수 없었다. 정말 먹기 싫은 음식 중 하나였다.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 썩 내키지 않은 음식임에는 분명했다.

어머니가 곰국을 한 솥단지 끓여 놓고 끼니때마다 내 주신 건 바빠서였다. 물론 건강도 챙기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겠지만, 새벽 일찍 나가야 하는 일정 때문임이 더 컸다. 가게를 다섯 시 반에 열어야 하니 집에서는 다섯 시 전후로 출발했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면 어머니는 이미 가게로 나가고 없었다. 식구 중 누군가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침상을 차려야 했다. 밑반찬은 냉장고에서 꺼내면 되고, 곰국이 있으니 어머니는 아침 걱정을 덜 하셨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곰국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많이 먹었기 때문일까. 지금도 돈 주고 곰국을 사 먹지 않는다. 누군가가 먹자고 하면 마다하지 않고, 집에서도 곰국을 내놓으면 마다하지는 않지만, 먹고 싶어서 지갑을 연 적은 없었다.

나는 커 가면서 자주 어머니 가게에 들락거리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를 도왔다. 바쁘게 움직이는 어머니를 멀뚱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질구레한 물건 정리·정돈부터 청소 등 간단한 일을 도왔다. 어렵지 않은 포장도 했다. 도마 위에 놓인 칼을 들고 허드레 고기를 손질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발골 칼을 잡고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직업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군대를 다녀와서 바로 어머니 사업장에서 일했다. 십 년 전이었다.

▲한우축사
▲한우축사

요즘은 하루에 소 한 마리 이상이 거래되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한때는 두 마리 이상이 판매되기도 했다. 가격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소고기 값이 늘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소고기 파동이 일어났다. 그럴 때는 소고기 공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걸 경험한 나는 그때부터 한우 사육을 고민했다. 내가 소를 사육한다면 각종 파동 때도 안정적으로 소고기를 공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축사를 알아보러 다녔다.

내가 선호한 지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담양이었다. 누나가 담양에서 살고 있고, 광주와 가까워 친근하게 느껴졌다. 다른 지역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담양만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매물로 나온 축사를 만나기 힘들었다. 신규로 축사 허가를 내는 것도 당연히 알아보았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행정 절차도 까다로웠고 주민 동의를 이끌어낸다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한우를 사육하기 위해서는 기존 축사를 매입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축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축사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정면에 위치한 축사였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규모도 작고 진입로가 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언제 축사가 나올지 몰랐다. 나는 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로 계약했다. 5년 전이었다.
 
지금은 한우 4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이 정도로 늘리기까지 귀농창업자금이 한몫했다. 창업자금으로 한우를 입식하여 사육 두수를 늘린 것이다. 그 전에는 송아지를 낳으면 팔지 않고 계속 키우는 식으로 숫자를 늘려왔다. 그러다보니 더딜 수밖에 없었다.
소를 사육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깊은 정이 들었다. 마치 소가 가족의 일원인 것 같았다. 가족하고 보낸 시간 보다 많으니 당연한 생각인지도 몰랐다. 사료를 줄 때면 마음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소가 사료를 맛있게 먹으면 다 먹을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내가 축사에 나타나면 소들이 너나없이 반겨주는 것도 같았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 커다란 눈망울에, 나를 반기는 모습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눈망울을 보면 가슴이 아련해졌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이 눈물을 흘린다는데, 그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키우고 있는, 가족 같은 소들도 결국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살장으로 끌려갈 게 아닌가. 생각할수록 마음이 착잡했다.
그럴 때면 괜스레 사육을 시작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소들이 반려동물이 아닌데도 반려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으니 후회도 많이 했다. 그것이 소들의 운명인 걸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들에게 더 깊은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뿐이었다. 축사를 더 청결하게 관리하고, 소의 상태를 더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러니까 쾌적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소들이 아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축사에 들어가면 반기는 지도 몰랐다. 그런 녀석들을 보면 의무감이 생겼다. 건강하고, 쾌적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살뜰히 챙겨야 하는 의무감.

나는 오늘도 무거운 의무감을 가득 안고 축사를 돌보았다. 내가 들어가자 소들이 쇠 파이프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녀석들의 얼굴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었다.
(※ 오믿음 귀농인은 2016년 수북면으로 귀농했다./ 010-6456-0111) / 강성오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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