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熱情, 信義’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4명의 자녀 모두 박사를 만들어
교육의 열정을 꽃피운 ‘맹부삼천지교

문중협 이석구 회장

∼나의 자녀들아∼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아!’ 소리가 나는 감동적인 사람이 되어라.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단다. 사람을 利害로 생각 말고 모두를 사랑해라.

가장 큰 상실은 사랑을 잃는 것이다. ‘카프카’, ‘장자’, ‘말테의 수기’를 읽어라.

사랑할 사람을 찾지 말고 사랑받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라.

평생 공부하고 배워라.

중국 고전 ‘논어, 맹자, 중용, 장자, 한비자’를 읽어라.

 

 

누구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다. 교육열이란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공부를 잘 해 서울의 명문대학교 또는 해외의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유명기업에 취직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부모들은 바란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에 관심이 부족하다. 자식교육은 늘 엄마의 몫이고 아버지는 그저 돈이나 벌어다 주면 그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의 역할은 어머니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석구 회장은 증명했다.

많은 영재들의 성장 과정을 살피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킨다고 해서 영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 영재를 만든 부모들은 자녀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자녀에게 맞는 교육 과정을 직접 설계하는 열성을 보였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도 깊게 고심했다.

케인즈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수학 과외 교사까지 물색하는 열성을 보였으며,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는 인도 총독 비서관이라는 바쁜 업무를 맡고 있음에도 아들의 과외 교사가 되어주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피카소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생업을 팽개칠 정도였다.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2남 2녀 4남매를 모두 박사로 키우고 이 회장 본인까지 고희를 넘긴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온 가족을 5박사 가문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이석구 회장을 만나봤다.

 


Q. 2남 2녀 자녀 모두 박사를 만든 비결은 무엇인가요?

A. 내가 욕심이 많았지요.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 돼요. 열정과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가지고 ‘사랑, 熱情, 信義’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교육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노력의 가치를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갔다 와서는 또 프랑스로 보내고, 다녀온 후 독일에까지 유학 가라고 했더니 “아버지 살려주세요.”해서 한국에 들어왔어요. 귀국해서는 또 석사 하라고 몰아붙인 아버지 때문에 사랑의 ‘사’자도 모르면서 바쁘게 살았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가 그렇게 원한 교수 자리를 맡게 됐다고 우리 딸이 얘기합니다.

집안사람들은 저에게 자식을 키운 게 아니라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녀교육에 성공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한 계명은 집념과 열정이지요. ‘자녀를 우선으로 생각하라,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집에 와서 TV부터 켜지 마라, 독서 습관은 지식의 필수 기초, 아침 식사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하자, 자녀와 자주 여행하며 세상을 가르쳐라, 자녀와 인성교육은 아버지가 맡아라, 자녀의 진로 지도는 아버지의 경험 결과물이다.’

 

Q. 회장님은 젊은 시절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29세부터 학원을 경영했습니다. 주로 취업을 위한 기술계에 집중했습니다.

 


Q. 李錫九 談論集은 직접 출간하셨나요?

A. 네. A부터 Z까지 모두 내가 만들었지요. 글씨 크기, 대소배열 디자인까지 모두 내 손을 거쳤습니다. 나의 인생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어 고희 기념으로 출간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역사, 곧 일기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레는 내일을 위해 자기의 보물을 찾아야 그 기쁨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능력, 인생의 설렘을 주는 그 보석을 찾아야 하지요.

談論集은 훗날 내 자손들로부터 ‘이석구’ 세 글자를 기억하고 인생지침으로 삼을 만한 책으로 만들었지요.

 

이석구 회장 가족사진


Q.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였나요? 현재 자녀들의 모습은 마음에 드시나요?

A. 철저히 엄한 아버지였지요. 아버지의 한마디는 곧 법이었고,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우리자식들에게는 무서운 아버지. 반면 엄마는 자상하고 늘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부족을 채우고 충족시켜준 1등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자식들의 모습은 미완성이지만 부모에 감사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대견합니다.

 

Q. 훗날 자녀들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A.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내가 설립한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 위치한 금산문학관을 우리 자녀들이 힘을 모아 대대손손 이어 가문의 명소, 대한민국의 명소로 빛내주길 희망합니다.

 

 

배우자 문영화 님의 남편 이야기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

배우자 문영화


<배우자 문영화>

‘나의 남편 이야기’

1963년 가을 친구의 소개를 받은 남편이 선을 본다며 내가 살고 있는 영동 친구의 친정집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와 그 집에 가서 어른들과 함께 남편을 만났으나 조심스럽고 분위기도 여의치 않아 얼굴만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게 아쉬워 용기를 내 다시 그 댁으로 가서 남편과 만나 둘이서 황학초등학교 주변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64년 3월 3일에 약혼, 4월 11일 결혼을 했고 2남 2녀를 두었다. 지금은 모두 결혼하여 독립시켰다.

남편은 성격이 급하면서도 느긋하며 치민하면서도 대범한 양면성이 모두 강하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비행기보다 빠르고, 관심이 없는 일은 완행열차 보다 느리다. 남편은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남에게는 최선을 다하면서 남편에게는 소홀히 한다”고…. 나도 남편 말을 인정했고 항상 미안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표현은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나를 대선에서만이 아닌 내 직업분야에서는 전국적인 유명인으로 만들어주고 연약한 나에게 용기를 주고, 어려움이 있을 땐 시원하게 해결해 주고, 나는 신경 쓰지 않게 편안하게 해 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학생들 교육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고 학생들 마음속에도 훌륭한 원장으로 남을 수 있었다.

57년을 함께 살아온 동안 아쉬움이 있다면 ‘학원경영자만으로 인생을 끝내기가 아까운 남편에게 내가 내조를 잘했다면 남편이 목적하는 바 큰사람의 뜻을 이룰 수 있었을 텐테….’ 나의 부족함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다.

우리 아들, 딸들의 오늘의 모습은 남편의 문화적 식견과 적극성의 결과이며 과연 자녀들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남편의 심형이 깃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 자식을 만들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욕심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창의력도 뛰어나지만 마무리 하는데 미흡한 것이 아쉬움이다. 남은 세월 얼마나 허락될지 모르지만 마음을 비우고 남편보필 잘 하며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건강하게 취미생활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 소망이다.

 

<장남 이지영(치의학 박사)이 아버지께 올리는 마음>

치의학 박사 장남 이지영


아들을 생각하시는 큰 사랑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을 계기로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와의 추억을 새삼 더듬어 본다.

오래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이화여자대학교를 다니는 큰누님 기숙사에 새로 뽑은 자동차를 타고 나들이 겸 방문한 적이 있다. 학교 캠퍼스 내의 주차장에 주차를 해 두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사이드브레이크가 잘못되었는지 차가 갑자기 뒤로 밀리며 자동차가 큰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나는 매우 놀란 상태였고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척 당황하며 어린 마음에 혼이 날거라 생각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침착하게 사고처리를 하시고 차를 공장에 맡긴 후 대전으로 내려오는 고속버스에서 “하늘에서 비행기 떨어지는 사고도 있는데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내 걱정을 덜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사랑을 느낀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나는 1남 1녀를 둔 가장이 되어 예전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키우고 가르쳤는지를 자주 생각하곤 한다.

우리 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정열은 끊임이 없으신 분이다. 팔순을 넘기기고 구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아직도 꿈과 희망을 갖고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고희가 넘어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고 사진, 여행, 문학 등 많은 활동을 아직도 열심히 하고 계신다. 항상 책과 가까이 하시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는 나의 아버지, 가끔은 좁은 소견에 잔소리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은연중 좋은 교훈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은 건강하게 바쁜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건강을 유지해 上壽, 天壽를 누리시길 바란다.

 

<큰며느리 송재희(이지영 치과 부원장)가 시부모님께 드리는 마음>

이지영 치과 부원장 큰며느리 송재희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결혼을 한 지도 벌써 24년이 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지난날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부모님께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저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아버님은 고희의 연세에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드실 텐데도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시고 아버님의 정신이 깃든 문학관을 만드시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들려주시는 세계사, 한국사 이야기,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지혜로운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삶에 크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또한 아버님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학원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옆에서 두 분을 뵈면서 삶의 지혜와 열정과 노력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항상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며 넉넉한 마음으로 두 분이 해외여행하시는 모습을 뵐 때면 저도 나이 들어 더도 덜도 말고 아버님, 어머님 두 분처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며느리를 항상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는 아버님, 어머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차남 이승현(보건학 박사)>

보건학 박사 차남 이승현


어떤 아버지 밑에서 자랐느냐가 운명을 가른다.

2002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신화를 이룩했다.

언뜻 생각하면 ‘축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인데 감독이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같은 선수라 할지라도 그 선수들에 대한 감독의 열정, 기술전수, 노하우전수 등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를 가져온다.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가족 중에서 아버지는 감독과 같다. 아버지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축구 감독처럼 모든 열정과 경험을 전수해 준다. 어느 아버지라고 자기 자식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만은 내용과 질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나뿐만 아니라 누나들과 형에게 쏟은 열정이 세상의 그 어느 아버지보다도 월등했던 것 같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가르침은 내가 살아가는 밑거름이고 삶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하면서 어려울 때나 갈등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 같으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판단을 하게 된다.

막내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만족스러운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해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내 아버지는 팔순을 넘기셨지만 앞으로 20년쯤은 건강하게 더 사실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건강생활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최소한 그만큼은 훈계와 꾸중을 계속 들어야 할 나의 행복한 과제가 남아있고 그리하여 아버지의 기대에 부합하는 훌륭한 막내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천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작은며느리 박유나 교수>

작은며느리 박유나 교수


아버님의 삶은 한 편의 소설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 처음 인사드린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결혼한 지 벌써 만 22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키운다는 핑계로 며느리 노릇 제대로 못해 그동안 마음 상하신 일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님은 늘 호되게 호통 치시지만 그것은 저희 걱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항상 옆에서 사소한 것까지도 챙겨주는 고마우신 어머님,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임에도 늘 편하게 대해주시려는 시누이들과 아주버님, 그리고 개성 강하고 사랑스러운 조카들…. 이렇게 만나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제가 누구의 아내,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되지만 가족과 함께 묻어가며 주희 아빠 존중하며 살아가는 며느리가 되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이고 그 숨결이 지금 우리가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는 뿌리입니다. 아버님의 삶은 도전의 나무, 평화의 나무, 희망의 나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커다란 숲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숲을 이해하고 닮아가도록 그 숲속을 깊숙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건강을 합장하며 기원 드리겠습니다.

 

<장녀 이국희(의학박사)>

의학박사 장녀 이국희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습니다.

근엄하기만 할 수도 없고 마냥 자상할 수만도 없는 역할이 아버지인 것 같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셨겠지만 직장 있는 아내를 둔 아버지들은 더욱 힘든 것 같다. 요즘은 자식을 한 둘만 두어 자식이 희소하기 때문에 아버지들이 근엄하기보다는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오히려 아이들 취향에 끌려 다니고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친하게만 지내고 아이들을 받들어 주는 부모가 아이들이 컸을 때 과연 존경받을 수 있고 인생의 모델로 기억될 수 있을까?

살면서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이 세 번 있었는데 하나는 대학 진학 문제였다. 평범한 과로 진학해서 정말 평범한 인생을 살겠다는 나에게 의대 진학을 독려하시면서 의대를 가면 40대가 되었을 때 ‘선생님’ 소리를 듣고, 일반과정에 가면 ‘아짐씨’ 호칭을 듣는다고 우스개 어휘를 쓰시면서 강권하셨다. 많은 다툼 끝에 이화대학교 의대로 진학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대로 그때 아버지께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하고 포기하셨다면 지금 산부인과 원장, 의학박사 이국희가 과연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옛날 나의 미래를 보시고 확고하게 진로를 결정해주신 아버지께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또 2006년엔 병원 개업을 앞두고 부모님의 훌륭하신 조언도 많이 들었다. 평소 물질에 탐욕하지 않고 진정으로 의술을 베풀 수 있는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봉사와 헌신의 정신을 강조해 오신 아버지의 뜻을 깊이 새기고 산부인과 진료와 어떤 육체적인 질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의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토록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자칫 그릇된 판단으로 일을 망칠 수 있는데 그때마다 도와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 기억에 나의 아버지는 아시는 것도 많고 언변이 좋으시다. 그리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좋은 기사만 나오면 간략하고 명확하게 정리하셔서 기회가 있을 때 전해 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마음의 지표로 삼으라고 하셨다. 그 말씀들은 너무나 구구절절이 옳고 훌륭한 내용들이어서 마음에 꼭 와 닿는 것들이었다.

가끔 부모님을 찾아뵐 때 우리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정말 보배 같은 가르침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금만큼 해주고 있나 반성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유서로 생각하라는 편지(자식의 자격)를 보내셨을 때 마음 한 귀퉁이가 저려오는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을 느꼈다. 아직 건강하시다고 느긋했다가는 뒤늦게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부모님께 보답하고 자주 찾아뵙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도록 노력해야겠다. 부모님 함께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로하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둘째딸 이주연(이학박사)>

이학박사 둘째딸 이주연


저는 아버지 신념의 작품입니다.

엄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나의 어릴 적 아버지는 따뜻한 사랑이 없는 독일 군인 같았다.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잘했다는 칭찬의 말씀은 한마디 없이 다음의 과제, 다음의 목표를 제시했다. 성취감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없이 숨 쉴 사이도 없었다. 그저 여유를 느끼는 것은 죄악인 것 같이 혼을 내셨다. 그때의 내 생각은 스파르타식 교육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성적이든, 학문적 지식이든, 나의 위치를 상층 수준을 굳혀주시려는 의지와 기대가 대단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스스로의 신조와 가르침에 ‘열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의 강요에 가까운 지시 중에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나는 영어를 열심히 했다. 중학생이 해외 연수 가기 희귀하던 때 아버지는 중2인 나를 하와이 연수를 보내 주셨다. 하와이 체류 중 나는 언어사용에 별로 불편함이 없었다. 귀국해 부모님께 “돈만 있으면 미국에서 얼마든지 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무척 대견해 하시고 기뻐 하셨다.

고2때 아버지가 총재로 계신 국제적인 친선단체가 미국장병 10명을 초청한 만찬 자리에서 나에게 영어로 우리 가정 소개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별다른 부담 없이 우리가정을 자랑 비슷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후일 지인들이 따님이 어느 대학 다니느냐고 물어 고2라고 했더니 모두 놀라더라고 하시면서 흐뭇해하셨다.

대학 졸업 후 숨 쉴 새도 없이 아버지의 지시로 미국 유학을 하고, 이국자격증 취득 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곧장 프랑스 유학을 갔다. 어학연수, 전공연수, 낮선 세상 적응 하려다보니 부모님생각, 고향생각, 그리움, 사랑이라는 단어 등은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야할 지경이었다.

프랑스 유학 후 아버지는 독일에 가서 계속 공부할 것을 원하셨지만 나는 아버지께 사정, 사정을 해서 귀국했다. 이제 한숨 돌리려나 했더니 이번엔 대학원 진학하라 하신다. 시험 준비를 하고 가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대학원 원서, 대학졸업증서 등 구비서류를 아버지께서 직접 떼어 오셔서 제출하라신다. 군대의 강행군도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학위를 받았고 교수가 되고 40이 안 되어 학과장이라는 중책도 맡았다.

아버지, 당신은 이 딸에게 쉬지 않고 노력해서 고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샘물 같은 힘을 주셨고 저에게 닥치는 일은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뛰어난 사람이라는 신념의 날개를 달아주셨어요. 아버지, 저는 당신의 신념을 먹고 자라온 아버지 인생의 걸작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별스럽지도 못한 나에게 당신의 운명을 맡겨 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출중한 성실성 때문에 우리가정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반성할 것들도 있겠는데 인격과 수양이 부족하였음을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갈등과 불화의 책임은 쌍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례의 원칙은 인생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어느 것이 중요한지로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가정을 잘 꾸려왔다고 믿기 때문에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누가 다음 세상에서 당신을 또 만나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모든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남편은 하늘같은 것이며 남편이 자신감을 갖고 빛나는 사람이 되도록 내조하는 것이 여성의 숨은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長子에게>

돈은 벌어야 한다. 그러나 떳떳한 돈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자손으로서 가문을 빛내야 한다. 그것은 자기를 빛나게 함으로서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기 직무는 철학의 경지로 제1인자가 되라는 것이다. 또 누나와 동생의 화합에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아버지가 시작한 문학관은 대를 이어가며 한국의 명소로 만들어라.

 

<次男에게>

창의력을 발휘하거라.

쉬지 말고 새로운 것을 찾아라. 아들은 두 명 낳아라. 아들이 없으면 조상에 대한 기본 의무 위반이며 매미가 한여름 노래만 부르다 사라지는 생과 똑같다. 자기발전을 위한 진지한 많은 노력도 결국 자식과 가문의 기반을 다져주는 것이다.

건성으로 농대 졸업한 너를 영어교사자격, 교육학석·박사,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뒤에서 독려한 아버지의 의지를 잘 알지 않느냐 그것을 평생 유념하며 살아야 한다. 영어학원으로 너의 인생을 담판 내라.

 

<큰딸에게>

이화여대졸업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너의 의지와 노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서방은 법원장에 만족하지 말고 대법관까지 오르도록 뒷받침을 잘해라. 노년이 되어 남는 것은 자식이다. 네가 남기는 최고의 작품도 자식이다. 아버지가 남기는 뜻 문학관 발전에 최선의 협조를 부탁한다.

 

<둘째 딸에게>

학교 시절 우등생으로 미흡해 항상 걱정이 되었는데 너의 밑천은 영어, 불어, 독어 구사력이다.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 너를 빛나게 하거라. 30대 이학박사 교수, 39세에 학과장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강 서방은 자기 일 알아서 하겠지 하지 말고 관심을 갖고 항상 의견 교환을 해라. 친정아버지의 마지막 작품, 문학관이 한국의 명소가 되도록 협조하거라.

 

금산문학관

 


萬姓橋(만성교)

글 문영화

만성교


한국의 1등 명문 뿌리공원은

대전의 중구 침산동에 위치한 씨족문화의 1번지

동남북이 산으로 둘러 있고

‘ㄷ’자 지형의 큰 계곡을 편하게 이어주며

백조노랫배가 노니는

호수위의 만성교 110m

산과물이 어울리는 선경이다.

다리를 건너면 만성의 조상 혼이 반겨주고

밤의 무지갯빛 조명도 눈이 부시다.

만성교는 1997년 11월 건립되었다.

 

 

▲이석구 회장 프로필

- 명지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 충남대 행정대학원 최고과정 수료

- 충남대 경영대학원 최고과정 수료

- 연세대 교육대학원 교육문학 고위과정 수료

- 대전홍명학원 설립 및 40년 경영

- 민주자유당(노태우 정부) 정책위원

- 대전 동구 문화원장 역임

- 국제 PEN 한국본부 34대 이사

- 국제라이온스 355-D(대전·충남)지구 총재역임

- 충남당진 신평이씨 대종회장 역임

- 충청의 미래당 최고위원

- 교육문화대상 수상

 

현재

- 한국소설가 협회 정회원

- 한국 문인협회 남북교류(위) 고문

- 금산문학관 설립자

- 성균관 33대 자문위원

- 대전 효교육원 명예교수

- 월간 시사저널 파워코리아(서울) 고문

- 월간 시사저널 청풍 고문

- 전국씨족 문중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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