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알 하나  

요새 우리 시단에는 많은 시들이 ‘생태시’ 라는 명목으로 제작되고 흘러넘칩니다.
이는 시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상상력이 그 뿌리를 같이 두고 있다는 자각의 결과입니다.
서정시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시적대상과 시적주체 간의 교감을 통해 양자의 동일화를 꿈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생태학적 상상력 또한 만물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생태적 그물 혹은 생태 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독일 출신 물리학 박사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물 시스템에 있어서 모든 존재는 ‘생명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주창하여서 20세기와 21세기의 생태학적 세계 이해에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지구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돌멩이 하나라 할지라도 전체 그물의 한 코를 점하면서 다른 그물코를 점한 모든 존재들과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도 한 그물코, 나무도 한 그물코, 새나 꽃이나 물고기도 한 그물코, 심지어는 무생물인 돌멩이나 흙 한 알갱이까지도 한 그물코를 점하면서 그 그물코들이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지요.  
  바닷가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항구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물을 손질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혹시 그물코 하나가 뜯겨져 있으면 고기잡이 때 고기가 탈출하려는 몸부림으로 그 고장 난 그물코로 인해 그물이 찢어지면서 고기를 몽땅 놓쳐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모든 존재도 생명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그물코 하나가 고장 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지구의 멸망을 재촉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현재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그물코’가 고장 나 있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물, 권력 등에 대한 끝 모를 탐욕이 오늘의 지구온난화, 산성비, 미세먼지 등등 모든 환경 생태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탐욕’이라는 인간의 그물코가 모든 존재들의 그물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그 탐욕이 삼라만상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본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형상이나 범주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무지가 인간의 실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만물의 재난을 가져옵니다. 불교철학은 고정된 형상들 곧 사물, 사건, 사람, 그리고 사상들이 환영(maya)에 불과하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한살이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사이클 속에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멸이 무서워서 집착을 낳고 집착이 탐욕을 낳아 결국 지구를 근본적으로 망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탐욕이 초래한 지구의 생태환경 문제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사람들 중 하나가 시인들이나 종교인들입니다.
시에서 서정과 경치가 잘 교감되어 있다는 뜻의 ‘정경교융(情景交融)’ 이나 동양의 종교에서 ‘인드라망’ 이니 하는 말들이 예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산수시나 일본의 하이쿠, 그리고 우리나라의 청록파 시인 등이 일찍부터 자연 생태와의 교감을 통한 생명의 찬양과 땅으로의 귀소의식을 드러내며 이미 생태시들을 써왔던 것입니다.
그런 생태의식을 잘 드러난 김준태의 「콩알 한 알」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 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그때 사방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준태는 밭의 시인입니다. 역전 광장에 떨어진 ‘콩알 하나’라는 ‘엄청난 생명’을 집어 들어 도회지 밖 강 건너까지 가서 거기 밭이랑에 꼭꼭 묻어주는 시인이 밭의 시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준태는 첫시집 「참깨를 떨면서」에서 최근 시집 「지평선에 서서」에 이르기까지 밭과 흙과 씨앗과 생명 사랑에 대한 시를 줄기차게 써오고 있는 시인이지요.
“밭은 말하지 않는다/흙을 모자처럼/눈썹 아래까지 눌러 쓰고/끝없는 명상에 젖는다/먼 하늘 햇빛 달빛을/그 넓은 가슴으로 받아/밭은 언어 대신에/잎새는 하늘로 펴주고/열매는 거꾸로 매달아놓는다.”
그의 시 「밭은 철학을 한다」인데, 이쯤 되면 그에게 있어서 밭은 삶의 시원이고 완결점이며, 삶의 현장이고 유토피아입니다.
시인이 밭을 그렇게 보는 것은 생명과 생명의 매개 역할을 해주는 곳이 밭이고, 개인적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 삶의 이상을 겨냥할 수 있는 곳이 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밭의 정직함을 노래하기에 그의 시는 현란한 은유나 낯선 기교 등을 배격하고 사물을 직정적으로 진솔하게 노래합니다.
 
환경위기나 생태계 위기를 다루는 시적담론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환경시’니 ‘생태시’니 ‘녹색시’니 하는 용어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됩니다.
환경시는 환경파괴나 자연훼손의 실상을 고발하는 문학을 가리킵니다. 지구의 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성비, 강과 산의 산업 독극물 피해, 미세먼지 등 지금 지구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를 낱낱이 밝힘으로서 환경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고발문학인 셈이지요.
생태시는 환경위기나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현상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따지는 문학을 말합니다.
1970년대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표층생태학에 맞서 심층생태학 이론을 펼칩니다. 표층생태학이란 정부나 대학 그리고 산업체 같은 데서 공해문제나 천연자원 고갈 같은 단기적인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심층생태학은 환경문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해결하려는 생태학으로 지금까지 우리 현실 속에서 주름을 잡아왔던 인간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생물평등주의를 앞세웁니다.
 
김준태의 시가 역전에 떨어진 ‘콩알 하나’를 ‘엄청난 생명’으로 집어 든 것부터가 이미 생물평등주의 혹은 만물평등주의에 직정적으로, 근본적으로 반응하는 사례입니다.
여기에 합리적 계산 같은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환경시나 생태시는 김준태의 ‘콩알 하나’라는 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우리의 농민들이야말로 이런 김준태 시인과 같은 생각으로 평생 농사를 지어오고 있기에 어디 빈 땅이 있으면 씨앗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