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억압과 불의에 항거하여 학생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4.19혁명의 의미와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아!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엄수됐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문희상 국회의장, 김명수 대법원장,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미래통합당 심재철 원내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박삼득 보훈처장, 4.19혁명 유가족과 유공자, 방형남 4.19묘지관리소장 등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초청인 2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도입 영상을 시작으로 헌화 및 분향, 국민의례, 유공자 포상(5명), 대통령 기념사, 기념 공연, 4.19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오늘은 목숨보다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의 가슴 깊이 민주주의를 심었던 날"이라며 "독재에 맞선 치열한 저항으로 우리는 함께하면 정의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더 큰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민주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4.19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혁명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향한 전 국민의 공감과 저항 정신이 축적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4.19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이며, 주권재민을 훼손한 권력을 심판하고 정치,사회적 억압을 무너뜨린 혁명이었다"고 덧붙였다.

"지금 코로나19의 엄중한 상황을 헤쳐 가는 힘도 4.19정신에 기반한 자율적 시민의식에서 비롯됐다"며 "억압 속에서 지켜낸 민주주의, 슬픔을 나누며 키워온 연대와 협력이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4.19혁명 유공자와 유가족에게 "2022년까지 부족한 안장능력을 확충해 모든 유공자들을 명예롭게 모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시인 김수영의 시를 인용하며 "우리 국민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우리 안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전하면서 기념사를 마쳤다.

기념식이 끝난 뒤,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기념탑 뒤편으로 이동해 4.19혁명 희생자 중 무연고인 故 전한승(초6)과 故 진영숙(중2) 묘역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묘비를 쓰다듬고 묵념했다.

한편, 4.19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불법적인 발췌 개헌(1952년)과 사사오입 개헌(1954년) 등 강압적인 통치행위(1959년 경향신문 폐간, 언론 탄압/ 정치적 라이벌 대선 후보, 조봉암 사형 집행 등)에 이어 1960년 3.15부정선거 행위가 결정적인 폭발원인이 됐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과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경합 중이었는데 2월 15일 조 후보가 갑자기 사망함으로 이승만의 4선 연임이 확실시 되자, 자유당 측에서 현직 부통령인 민주당 장면 박사를 떨어뜨리고, 자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상상 못할 부정선거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대구에서는 일요일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키고, 민주당 장면 부통령의 유세 현장을 못 가게 막는 등 탄압이 이어지자, 2월 28일 대구고와 경북고 경북여고, 계성고 등 1200여 명이 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결의문 낭독 등을 하게 된다. 이에 공권력은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학생들을 연행하고 강제 해산시킨다.

3월부터는 일부 대도시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치며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투표 날인 3월 15일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 행위가 일어났다. 현금,물품 제공, 대리투표,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투표지,투표함 바꿔치기, 정치깡패 동원 공포감 조성, 참관인 추방, 유령표, 득표수 조작 등의 행위로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된다.

민주당은 3.15선거가 완전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강력 주장했고,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들이 분개한 가운데 반정부 시위가 광주,대구,서울,부산,대전 등 전국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마산시민 1000여 명이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일부 파출소가 불타는 등 시위가 격화되자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 총을 발포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4월 11일에는 마산 앞바다에서 남원 출신 김주열(마산상고 학생)이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참혹한 시신이 발견된다. 이를 취재한 부산일보 마산 주재 허종 기자의 보도로 김주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돼,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마산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2차 마산 3.15의거가 전개됐다.

전국 대도시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치깡패 괴한들에게 무차별 피습을 당한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 돼,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1960년 4.19일(화) 서울,부산,대구,마산,대전,전주,청주,제주 등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한 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서울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는 학생들과 시민 등 약 10만여 명이 집결해 경무대로 향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시위대가 점점 다가오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비극적인 상황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해온 신문사, 경찰서 등을 불태우고 습격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자, 오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최경록 장군의 만류로 온건한 사태 해결에 나섰다.

4월 25일에는 전국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걸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만여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며 살인정권 퇴진을 압박했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84)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면 하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장기집권을 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훼손한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4.19혁명 관련 희생자는 초,중,고,대학생,시민,경찰 등 186명이며, 부상자는 6000여 명으로 알려졌다.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의롭게 죽어간 이들과, 부상자로서 사망자, 유공자 등 445기가 묘역에 잠들어 있다. (출처 4.19혁명 관련 자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네크라소프-

최형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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