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극동대교수 조환동
전 극동대교수 조환동

많은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한다. 공짜를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自己의 利益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票에 굶주린 말기감투병환자들이 돈(金)에 굶주린 말기공짜병환자들을 量産하고 있다.

世上에 공짜가 없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국민들은 공짜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相當한 代價를 支佛하지 않은 富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努力을 피하고 싶은 心理를 逆으로 利用하여, 공짜인듯이 사람을 眩惑하여, 慾心많은 사람을 모이게 한 후에, 이를 이용하여, 한 목 잡으려는 奸詐한 政商輩 무리가 많은 것을 經驗的으로 알고 있기에.

공짜는 陷穽을 숨기고 있으며, 人性을 죽이는 毒을 품고있다. 正當한 代價가 아니면, 결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一生을 사는 高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日本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의 努力 以外의 것을 바라지 말고, 공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誘惑을 이기고 물리치는 方法이며, 깨끗한 삶을 사는 길이고, 행복하고 멋진 生活을 繼續할 수 있는 最善의 방법이다. 努力한 것만을 바라고 그 외의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면, 罪惡에 빠지지 않고, 虛妄한 慾心으로부터 自由롭고 悠悠自適한 인생이 될 수 있다. 英國,美國,독일,프랑스,핀란드,싱가폴,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이다.

공짜를 바라는 것은 勤勉을 否定하고 僥倖心과 射倖心을 가지게 하며, 급기야 不幸한 老年을 만들게 한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는 것이라는 眞理(러시아 속담)를 알아서, 慾心없이 淡淡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일이다. 이런 삶이 진정한 幸福이다

태만, 거지근성, 노예근성... 사회에 기대며 세금을 축내며 살아가는 인생들, 베짱이들... 독립성, 자율성, 존엄성을 상실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Autonomia로서 자율(auto)과 nomos(rule, 규칙)의 합성어로서 ‘自己規則’이다. 이는 自己管理, 독립적인 의사결정, 선택의 자유가 포함된다. 자율은 개인차원의 선택이 아닌, 지켜야 할 의무에 속한다. 자율성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한평생 일관성있게 유지되어야 할 생존의 조건이다.

이런 자율성이 약해지면 자연히 自己怠慢 혹은 自己放任 상태에 빠지게 마련이다. 인간의 고유가치인 존엄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심을 잃게 됨은 물론이다. 사회적 서비스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의무 까지 등한시 하는 경향까지 보인다는 사실에서 自己怠慢은 죄악이다.

자기태만은 자기방임으로서 자신의 무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존엄성을 잃는것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단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무엇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도전감없이 방구석 혹은 주변 벤치에서 빈둥빈둥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각종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만의식이 생기면서, 사회적 고립 또는 빈약한 사회적 약자로 떨어지게 된다.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면 공짜근성이 생겨난다. 자신도 모르게 뻔뻔해지고, 우연한 행운이나 바라고, 누군가에 기대려 한다.

존엄은 자신에 대한 가치와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평안함을 의미하는 말로 품위유지와 맥을 같이 한다. 品格은 전 생애를 거쳐 구축되는 것이지만, 늙어가면서 더 염치가 없어지고 분수를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존엄성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또 존엄성은 자율성이 뒷받침 돼야 가능하다.

자율성이 주어진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 自治, 自己決定, 自己意志, 개성의 자유, 독립생활, 책임과 의무감, 自己知識의 함양 등이 가능해지는 상태다.

공짜꾼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달픈 얼굴로 보인다. 공짜꾼들은 국가와 사회와 가족들을 성가시게 한다. 이들은 남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하게 되거나, 자칫 도움만 바라는 求乞 心理가 자리 잡게 된다. 나아가 규칙적인 생활과 질서, 사회계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생긴다. 일종의 社會的 逸脫이다. 비겁해지고 나약한 존재가 된다.

남의 도움을 당연시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夫婦 子息간에도 서로 폐 끼치지 말고, 자율적 독립적 욕구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이다. 정상적인 지불을 하고 살겠다는 自立意志가 필요하다. 스스로 삶을 해결해 가야 한다.

구걸 공짜심리를 극복하고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체 기능적 자율성(독립성), 사회적 자원에 대한 자율성(지원단체, 인간관계), 개인의 자율성(自己決定)이 확보돼야 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위생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관리하는 일이다. 개인이 불안정한 생활을 할 때는 의존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마련이다. 게으름은 인간을 퇴행으로 이끈다. 칸트(I, Kant)의 實踐哲學에서는 老年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젊어서 근면하게 살아라! 하는 조건적 명령을 하고 있다.

生業에 대한 召命意識(work as calling)을 갖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3D(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 업종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의식이 필요하다. 일에 대한 사랑은 자신이 賤해지고 弱해지는 것을 막는 최선의 행동이다.

신념, 가치, 취향, 열망과 행동, 개인적 자유를 위해서는 獨立과 選擇이 중요하다. 독립은 개인이 스스로 작동하는 능력이고, 선택은 실행적인 기능적 목표이다. 이런 독립과 선택을 위해서는 사회변화에 잘 적응하며  도전할 수 있는 과거와 다른 行態變化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위한 싸움 말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능력없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 만한 여력이 없다. 자식에게 내 맡기는 삶이 아니라, 부모에게 내 맡기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직접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結論的으로 수 천만 명이 살아간다면 수 천만 가지의 삶이 있고, 自由意志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않는, 自己責任의 意志가 필요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의존성을 낮춰가는 것은 개인의 노력 如何에 달려 있다. 선진국 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않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실천해가고 있다. 건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자율적, 독립적인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성공하는 인생이다.

조환동(전,극동대교수)

 

저작권자 © 한국시민기자협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