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깔 명인 김종혁(담양죽산매구 상쇠)
대나무악기 복원과 향토문화 보존, 큰 성과 거둬

▲김종혁(고깔명인)
▲김종혁(고깔명인)

“우연히 듣고서 무턱대고 만들었습니다.”

김종혁 고깔 명인은 우리 농악, 담양의 농악이 좋아 젊어서부터 십수년째 농악놀이에 필수인 고깔은 물론 사물놀이와 국악에 반드시 있어야 할 국악기를 대나무로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자신도 담양향토문화재인 죽산매구 상쇠로 활약중이다. 그는 2013년 (사)대한명인회로 부터‘국악소품 및 고깔’ 분야‘대한명인’에 선정됐다.
그를 만나 왜 그리 돈 안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지 들어보았다.

우연히 접한 기회가 인생을 좌우할 때가 종종 있다. 낯익은 것이라면 기회라고 직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낯선 분야라면 기회인지 아닌지 판단도 하지 못한 채로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김종혁 명인은 우연히 접한 것들이 인생을 바꿨다. 그것도 180도로.

담양 출신인 그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금속노조 활동을 위해 우리 악기를 처음 접했다. 당시 나이 스무 살이었다. 처음 다루는 악기들이라 남보다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요했기에 고생을 마다 않고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 10여년 농악을 배우다 우연히 정득채 명인을 만났다. 꽹과리 명인인 선생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광산농악 꽹과리 예능보유자였다. 그는 선생에게 꽹과리를 배웠고 이수자로 등록됐다.

광산농악을 배우다 그는 고향의 농악도 배워보고 싶어 아예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정면에 둥지를 틀고, 노종남 전 월산농협조합장님께 설장고를 배우다 우연찮게 대나무 장고 이야기를 들었다. 우연치 않게 들은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만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았는데 제대로 된 자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지로 마감했다는 것만 알고 무턱대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성공했다는 것과 같다. 온전한 성공인지 미완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자신감을 얻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악기 만들기에 도전했다. 그는 혼신의 노력 끝에 북과 소고, 법구 등을 대나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대나무를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일까. 소리가 더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장고와 북 등 대나무 악기를 복원하는데 성공한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우리나라 악기 뿐만 아니라 외국 악기를 대나무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대로 모방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변형도 해 보았다. 그러느라 그는 사재를 털어야 했다. 단순한 욕구와 충동으로 그는 점점 빈털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담양 향토문화재 1호 '죽산매구' 농악
▲담양 향토문화재 1호 '죽산매구' 농악
▲담양죽산매구 상쇠 김종혁(앞줄 중앙)
▲담양죽산매구 상쇠 김종혁(앞줄 중앙)

“맥이 끊겼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대나무 악기 복원에 자신감을 얻은 그에게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조선시대 때 맥이 끊겨버린 생황을 복원해보겠다는 거창한 목표였다.
“생황이 인류 최초의 대나무 악기이고, 궁중 음악의 핵심이었다는데 맥이 끊겼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자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생황은 전설과 같은 존재였다. 봉황과 같고 봉황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했으니 어찌 전설과 같지 않겠는가. 막연했다. 봉황이 상상 속의 새이듯 생황도 상상 속의 악기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복원에 나섰다. 자비를 들여 중국까지 건너가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상식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무모한 시도였다.

그의 노력을 알아주는 단체가 생겼다. 전라북도 국악원에서 생황 복원에 나선 것이었다. 국악원에서 나섰기에 생황이 복원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국악원도 한계가 있었다. 경비는 지원이 가능했지만 정작 복원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지원받지 못했다.
“생황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주로 쓰였는데요, 중국과 일본에서는 생황을 복원했습니다. 우리만 못했습니다. 우리도 복원하려고 의뢰했는데 제작비를 8천만 원 달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거액이지만 국악원에서는 가능할 것도 같은데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지원이 거기까지 되지 않은지 그는 알지 못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는 개인적으로라도 복원해보고 싶은 욕구가 가심 밑바닥에 깔려 있다. 생황은 1박과 13죽관의 구조라고 했는데, 하모니카와 비슷한 원리였다. 그는 나름의 연구로 복원해 보았지만 모양을 복원하는 정도였다.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 소리 나지 악기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언젠가는 복원한 생황에서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알면서 하지 않은 것은 죄다.”

▲대나무 악기 제작중인 김종혁 명인
▲대나무 악기 제작중인 김종혁 명인

대나무 악기를 복원하고 담양의 향토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그의 노력은 가열차고 지속적이었다. 노조활동을 위해 접한 악기가 그에게 언젠가부터 복원에 대한 큰 의무감으로 느껴진 것이었다. 그래서 신이 그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우연을 가장하여 대나무 악기를 복원하려는 일을 맡기려고.

“알면서 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대나무악기뿐만 아니라 고깔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고깔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복잡한 매무새를 단정히 해야 하기에 여간 까다로운 분야가 아니다. 게다가 찾는 이도 드물다. 때문에 고깔을 제작하는 이가 없다. 그가 유일하다.
그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고깔을 쓰고 공연하는 '죽산매구'가 담양군 향토문화재 제1호에 지정된것이다. 또 그가 만든 대나무악기와 고깔로 인해 대한민국 명인에 선정됐고, 제22회 전국예술대회에서 공예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명실공히 명인의 반열에 올라 선 것이었다.
 
“후손들에게 죄는 짓지 말자.”

명인은 요즘도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다. 또 다른 사명감이 생긴 것이다. 대나무 악기를 복원하려고 발품을 팔다 보니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이 너무 많았다. 그가 나서지 않는다면 맥이 끊길 것 같았다.
“맥이 끊기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거잖아요? 그래서 죄는 짓지 말자는 마음으로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그가 자료 확보를 위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연세 드신 분들이라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간을 쪼개가며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녔다. 입춤, 수건춤, 칡넝쿨줄다리기, 화음들노래, 상여소리 등을 영상에 담았다.

“전통 문화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의무 같았습니다.”
명인은 의무를 다하려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마땅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생각한 게 공연이었다. 명인은 대나무악기 연주단을 창설해 각종 행사장에서 공연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구성원들이 농민이라 행사와 농사철이 겹치면 농사가 우선이기 때문에 결원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것이 혼자 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개인이 하는 것보다 기관에서 해야 제대로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명인은 그동안 수집한 영상 자료를 담양군청에 기증했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장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중한 자료를 군에 기증한 것이었다.
“자료를 넘겼으니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후손 중 누군가가 명맥을 이어가리라 확신합니다.”
명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을 향한 눈빛 같았다. 이러려고 저를 점지했냐고, 우연을 가장하여 또 무슨 책임을 부여할 것인지, 신에게 묻는 듯했다./강성오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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