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녹원 시가문화촌 식영정 가객 강정덕 선생
가야금과 판소리 국악체험, 죽녹원 힐링관광의 백미

▲가야금명인 강정덕 선생
▲가야금명인 강정덕 선생

“죽녹원에서의 봉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죽녹원 시가문화촌 식영정에서 관광객들의 국악체험을 통해 죽녹원 힐링관광의 운치를 한 것 드높여 주고 있는 가야금·판소리 명인 강정덕 선생을 만나보았다.

강정덕 선생은 1957년에 담양읍 천변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국악이 너무 좋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면서 국악에 빠졌다. 용돈 주면 모으고 학원비가 부족하면 책을 산다는 핑계로 학원비를 마련할 정도로 국악에 흠뻑 취했다.

강 선생은 스승만큼은 제대로 만나고 싶었다. 문화센터에서도 국악을 배울 수 있겠지만 그녀는 대가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무형문화재인 임동선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그리고 그분의 따님인 중앙대 임경주 교수에게 사사받고 있는 중이다. 임경주 교수는 국악은 희로애락이라고 강조하시곤 했다. 가야금 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셨으며 자식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쳐야 한다고 했다.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것이랬다. 그녀는 임 교수 말처럼 가야금에 미쳤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야금을 탔다. 얼마나 심취했던지 가야금에 피가 뚝뚝 흘리는 것도 모르고 연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40여년을 사사받다 보니 어느덧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피아노를 전공한 그녀가 우리 음악을 홍보하는 것을 임 교수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녀는 그저 국악이 좋아서 배웠지만 이제는 국악을 나누려고 바쁜 시간을 쪼개고 있다.

▲죽녹원 시가문화촌 '식영정'
▲죽녹원 시가문화촌 '식영정'

 

 “죽녹원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강정덕 선생은 주말이면 죽녹원에서 우리 음악을 홍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보람 있다. 그녀는 가야금, 아쟁, 북, 장고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룬다. 연주를 들으려는 분들을 위해 차와 다과를 준비하기도 한다. 물론 자비로 해결한다. 그만큼 우리 국악을 알리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주말에 특별한 일정이 잡히면 다른 분을 세워놓고 자리를 비울 정도로 애착이 강하다.

그렇게 죽녹원에서 홍보하다 보니 특별한 인연이 생겼다. 8년 전이었다. 시각 장애인들이 죽녹원을 찾았다. 3백 명가량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연주하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경청했다. 그 모습에 인솔자가 그녀에게 요청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그녀는 바쁜 일상 때문에 거절했지만 인솔자가 1년여를 매달렸다. 그녀는 죽녹원을 비우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봉사활동이긴 하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이라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끈질기게 부탁하는 바람에 군청에 양해를 구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다른 곳에서 봉사하려 한다고 사실을 말했다. 그곳에서 담양 홍보를 더 많이 할 거라고도 했다. 그렇게 시각장애인들에게 봉사를 시작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 단체는 다양했다. 침을 놓아 주기도 하고 마사지를 해주신 분도 계셨다. 그녀도 그분들과 함께 국악을 들려주었다. 한번은 그녀의 연주를 들은 부부가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부부 중 남편은 전혀 앞을 보지 못하셨고, 아내는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그분들의 집이 너무 정갈한 것이었다. 마당의 잔디밭과 텃밭에 잡초 하나 없었다. 정리정돈이 일반이 못지않았다. 한 마디로 집안이 깔끔했다. 그런 집에서 기른 배추며 무 이파리를 뜯어다 고기를 구워 주셨다. 잘 보이지 않아 야채에 약간의 이물질이 끼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분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시각장애인들에게 재능 기부를 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관광객과의 소통이 즐거운 강정덕 선생
▲관광객과의 소통이 즐거운 강정덕 선생

강정덕 선생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8년 째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그분들을 찾아 갈 때면 떡이나 고구마 샐러드 등을 준비해 간다. 재능기부를 가면 보통 10여 분 정도 모인다. 하지만 그 열 분을 위해 이삼십 명이 움직인다. 그런 봉사자들을 위해 그분들은 만 원씩 갹출하여 막걸리와 안주거리를 준비하곤 했다. 지원해주겠다는 단체가 많지만 그분들은 일체 지원을 거부한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도 만 원씩 갹출하여 먹거리를 준비해서 나눠먹곤 한다. 아름다운 봉사 덕에 그녀는 마음에 살이 통통히 찌고 있는 중이다. 천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79년이었다. KBS에서 ‘우리가락 우리춤’이라는 봄철 프로그램이 있었다. 임경주 교수의 지도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도 계속 봉사를 해오고 있다. 그녀는 전문 연주자는 출연하는데 조건을 내걸지 않았다. 그런 탓에 방송 출연도 자주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소중한 경험이고 재산이었다.

80년도에 코리안 국악제가 부산에서 있었다. 그녀는 가야금을 들고 참가하여 국악부 우수상을 수상했고, 제3회 진주 개천예술제에 나가 가야금병창 부문 장려상을 수상했고, 제18회 임방울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 신인부 대상을 수상하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강정덕 선생은 그런 경지에 이르기기까지 기초에 충실했다. 기초라 할 수 있는 세 가지는 말로 하는 시창, 듣고 하는 청음, 보고 하는 초견이다. 그렇게 기초에 충실했던 그녀가 이제는 수험생들에게 세 가지를 강조한다. 배우고자 하는 수험생이 있으면 그녀는 아무런 조건 없이 가르쳐주곤 했다. 인생이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요로 한다면 밤잠을 줄여서라도 지도하곤 했다. 피아노도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웠지만 가야금 산조나 판소리와 병창도 인간문화제를 통해 사사받았다. 그런 분들에게 사사받으려면 비용도 상당했다. 그녀는 그렇게 배웠지만 지금은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동생이 든든한 조력자였다.”

강정덕 선생이 부담 없이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것은 든든한 조력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조력자는 바로 강윤구, 남동생이었다. 담양에서 국궁장을 운영하는 동생은 그녀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발 벗고 도와주었다. 집을 옮길 때면 방음과 흡음을 완벽히 하여 음악실을 꾸며주고 그랜드피아노도 사주었고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가야금을 사주었고 사사받는데 필요한 돈도 대주었다.

요즈막 강 선생의 남편 또한 그녀를 위해 외조를 아까지 않는다. 먼 길 갈 때면 손수 운전을 해주고 의상도 챙긴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번 따라다니더니 정말 힘들게 봉사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외조를 자처한 것이었다. 신협 임원 출신인 남편의 외조로 요즘은 마음 편히 봉사할 수 있다.

강 선생의 딸 또한 그녀를 위해 바쁜 시간을 할애했다. 딸은 제1회 대나무축제 때부터 지금까지 축제 기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재능기부를 했다. 모녀가 연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지 KBS에서도 모녀를 불렀다. 모녀 연주가 그만큼 귀한 모양이었다. 딸은 에니메이션과 3D와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런 딸이 그녀와 함께 우리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것도 동생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제 강정덕 선생에게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통해 우리 가락과 우리 소리를 접해보기를 바라고 세계무대에서 우리 것을 홍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소리가 몇 곡이나 되고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떻게 부르는지 등을 세계인에게 홍보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 그런 날을 하루 빨리 앞당기려고 그녀는 오늘도 세계로 눈을 돌린다. / 강성오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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