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열 살 무렵에 나는 늙은 타고르를 만났다. 그는 나를 시처럼 바닷가로 데려가지는 않았다. 바다와는 전혀 다른 첩첩산골에 수염과 머리를 하얗게 날리고 찾아왔으며, 들판 가운데 넓다랗고 깊은 강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손은 언제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미풍에 긴 수염이 흔들리곤 했었다. 그는 내가 익히 알던 늙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며 가난한 농민을 감싸안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만화책을 펴놓고 읽으면서도 시선의 한부분은 늘 바닷가에 가 있었다. 또래들이 동시를 낭송할 때 나는 바닷가에서를 낭송했다. 그렇다고 그의 시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출렁이는 바다, 가없는 하늘, 헤엄치고 그물을 던지며 진주를 캐내는 바닷가를 인도 사람이 어떻게 알까. 내가 태어나 잠시 살았던 동해 바닷가 모래톱에서 나 또한 모래성을 쌓고 놀았었는데 저 멀리 있다는 인도나라의 늙은 시인이 어찌 알아버린 것일까. 호기심의 출발이었으니까. 내 유일한 상상에로의 탈출구. 타고르의 바닷가에서는 내게 유년의 시절 가장 훌륭한 술래집이었으며 세상을 엿볼 수 있는 문학적 통로였다.

 

그가 만들어 준 강은 계절마다 내게 풍부한 수분을 주었고, 나는 그때마다 적당히 반응하는 토양이 되어갔다. 그는 내 손으로 원고지를 마련하게 했으며, 처음으로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비현실적이며 생소한 의문을 갖게 했다. 하얀 풀꽃이 무더기로 피었다가 삽시간에 잠겨가는 것도 보았으며, 가물에는 절대 푸르렀음을 기억조차 못할 만큼 매정하게 타들어가는 것도 목격했다. 타고르는 그렇게 찾아왔다가 썰물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오늘,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내 집 창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여전히 긴 수염과 늙은이의 모습으로.

 

오랫동안 문학에 대한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었다. 특별히 시에 관하여는 파고들수록 점점 더 난해하며 복잡한 구도를 띠고 있어 그 의문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질렸다. 그러나 나는 타고르의 바닷가에서 보다 훨씬 더 뒤늦게 읽게 된 성경속에서 놀라운 문학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신선함으로 간략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모든 사물이 갖는 일상적인 질서 혹은, 광범위한 문학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 엎는 지식적 빅뱅이었으며, 감성의 난파였다. 다시 말하면 최초 인류 문학의 시초가 바로 성경이었다.

모든 쟝르를 아우르는 다양성에서 놀랐으며, 그럼에도 오직 예수라는 이름 하나가 다양성위에 빛나는 단 하나의 주제임을 깨달았을 때의 그 충격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바람 한점 부는 것에도 별들이 뜨고 지는 것에도 흥분했었던 문학의 유혹이 점차 사실적 지성으로 바뀔 즈음에 나는 내 일생을 통해 가장 빛나는 시 한편을 만나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하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23:1-6)

 

다윗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분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고백은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시의 첫 귀절에서 담대하게 선포되어지며 마지막에 반드시라는 움직일 수 없는 약속의 단어로 성취를 이뤄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절절히 담겨있는 찬양시를 기쁘게 흠양하셨으며 또한 그리 행하셨으며 다윗은 시의 결말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다윗의 생애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소망이 고스란히 함축되어진 시편 23편은 요즘 말로 시와 문학을 뛰어 넘는 절대적 종결시라 감히 말 할 수 있다. 다윗의 시를 읽다보면 호흡이 가빠지기도 한다.

긴박한 사건의 현장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뤄내는 지극히 남성적인 필체인가 싶으면 어느 순간 새벽 미명, 고요함 속에서도 세미하게 열려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몸을 떨며 입술의 고백을 드릴 줄 아는 섬세한 신앙인이자 동시에 겸손한 시인이었다. 다윗의 시에서 확인되듯 그는 결단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시는 진솔한 삶을 서술하려는 최선의 표현이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과 공경의 고백이었으므로 그의 시를 문학적 가치로 따져 흥정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갈팡질팡하던 시와 문학에 대한 나의 시선이 확연해졌으며 잠시 위축되었던 감성은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인도 시인 타고르. 오늘 다시 그의 시를 손에 들었다.

 

에게 바치는 頌歌

내 욕망은 산더미 같고

내 울음소리는 처절했으나

님은 언제나 무정한 거절로 날 구원하셨으니

이 엄하고 엄한 님의 자비는

내 온 생명 속에 깊이 스몄습니다. (기탄잘리 중)

 

기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위험에 처하여도 겁내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매일 매일 우리 집안에 성공과 기쁨이 연속 될 때에만하나님이 자비 하시다고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거듭되는 실패와 슬픔과 고통속에서도하나님이 내 손을 쥐고 계신다고 감사하게 하소서

Rabindranath Tagore

타고르는 힌두교도였다. 그러나 그의 창작세계엔 특정 종교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문학적 사상은 겸손한 삶과 인생의 고통이었다. 그가 영적으로 교감하는 신이 누구이던 간에 훗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자신들의 삶에 대입해서 적절한 대상을 첨부했다. 당신으로 나타났던 자리에 나는 서슴없이 하나님 이름을 새겨놓았다. 신에게 바치는 송가와 기도를 읽으면서 나는 타고르의 정신세계에 의문이 들었다. 아니, 분명 힌두교도였던 타고르였음에도 그가 신에게 의뢰하고 감사하는 구절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서 나는 다윗의 시를 발견했으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용기있는 고백과, 욥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담담하던 고난에 대한 술회, 그리고 솔로몬의 낭만적 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타고르 역시 문학의 모태는 성경이 아니었을까.

그 후 수십년이 흐른 지금, 다시금 늙은 타고르의 시 한편을 읖조려본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 그가 사랑한 코리아를 이방인처럼 낯설어하며 조심스럽게 조우한다.

 

바닷가에서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입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쉼없는 물결은 사납게 출렁입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소리치며 춤추며 아이들이 모입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 껍질로 놀이하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망망대해로 띄워 보내는 아이

모두를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그물 던질 줄도,

진주 잡이는 진주 캐러 물에 뛰어들고

상인들은 배타고 항해하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다시 흐트립니다.

그들은 숨은 보물을 찾지도 않고,

그물을 던져 고기잡이 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대고 소스라쳐 부서지고

기슭이 짓는 미소는 파리하게 빛납니다.

죽음을 거래하는 파도도

아가의 요람을 흔들 때의 엄마처럼

아이들에게 뜻모를 노래를 불러 줍니다.

이렇게 바다는 아이들과 놀고,

기슭이 짓는 미소는 파리하게 빛납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입니다.

길없는 하늘에 폭풍이 배회하고

배는 흔적없는 물살속에 파선하고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어도

아이들은 놉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의 위대한 모임이 있습니다.

 

Rabindranath Tag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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