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의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 필자.
[온 국민이 기자인 한국시민기자협회 신문식 기자회원 ] 기온이 뚝 덜어졌다. 자연은 달력이 없어도 계산을 잘한다. 망각도 없이 말이다. 망각이나 좀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봄인가 하면 여름이고 여름인가 하면 가을로 성장이 멈춰 죽음과 같은 겨울이 되어버린다. 죽음? 그것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창고인 것 같다. 조용하면서도 새봄에는 더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젊음을 과시하며 가족과 가정을 위해 몸 바쳐 헌신했던 노인들에게는 괴로움의 계절이다. 젊은 날에 경제적 좋은 조건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노인들은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 모시고 함께 살면서 오직 자식 잘되기를 두 손 모아 빌며 살았던 세대들이다.

그들은 젊은 날의 청춘 시절에 부모님을 모시면서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수중에 경제적 주머니를 찬 노인들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자식을 가르치고 결혼을 시키며 집까지 만들어서 새 살림살이를 차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노인들의 30년 후배세대, 4~50대들은 학교만 가르쳐주면 부모의 할 일은 다 한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의 노년도 생각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내가 돈이 없으면 찬바람 쌩쌩거리는 들판에 서 있는 나목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내 수중에 경제적 생활이 보장되지 않으면 현대식 고려장 요양원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노년 나의 삶은 내가 지켜야 하므로 배우려는 자식은 가르치되 최소한 대학까지 보내면 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자식이 어려운 세상살이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면 그래도 품고 살아야 한다. 결혼도 못 하고 직장도 없는 젊은이들도 많다. 부모는 이런 자식들을 학교만 나왔다고 내버려 둘 것인가? 그 30년 후배세대들은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하기야 그들은 천륜을 끊고 인면수심의 탈을 쓰고 부모를 학대하고 죽이고 불을 지르고 보험을 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안 했던 자식들을 많이 봐 왔고 친구들을 통해서 들었으며 수없이 보도하는 것을 봐 왔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길거리에는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하다.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시계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겨울로 가기 위한 시간을 셈해본다. 그러나 밟힌 낙엽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자연은 언제나 순환하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변한다고 말한다. 낙엽은 당신이 밟았기 때문에 소이내어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말동무가 있어서 행복하단다.

나는 낙엽이 떨어지면서 나무 뿌리근처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 본다. 추운 엄동설한에 뿌리가 얼면 새봄을 기약할 수가 없다고 낙엽은 말한다. 그래서 낙엽은 나를 낳고 키워서 물들여서 주신 뿌리를 위해서 뿌리를 덮고 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낙엽귀근(落葉歸根) 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노년의 생활은 슬퍼하지도 자랑하지도 말고 나뭇가지에서 붙어있을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떨어지는 낙엽처럼 새로운 변화로 제2의 삶을 살기위해서 밟히는 낙엽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을낙엽은 노인에게 말동무를 해주는 좋은 친구이자, 교훈을 주는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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